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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망을 앞당긴 삼총사! 일본군 '3대오물'

똥베이런 201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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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의 패망을 앞당긴 일본군 장성 3명을 묶어서 현대 일본 사회에서 일컫는 말로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극우들도 버릴 만큼 일본의 흑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제국 당시 일본 내부에서 최대 파벌이었던 일본육군사관학교, 일본대학 출신들이 도조 히데키가 내각을 뒤엎고 전시 수상에 취임한 뒤에 능력과 관계없이 파벌의 인사들을 요직에 올렸다는 점과 동시에 국가 지도자들이 무능하면 나라가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타구치 렌야(일제 육군 중장)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


"일본의 독립운동가 무타구치 렌야"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측 연합군의 수호신"


"다른건 다 이해가 가는데... 저 녀석은 왜 앉아 있냐? 명예 훈장 받으러 왔냐?"


-아라키 사다오가 무타구치 렌야를 보고 어이없어 하며-



중일전쟁의 일화들


중일전쟁은 무타구치 렌야가 일본군 훈련중 병사 하나가 똥 싸느라 화장실에 가서 인원수가 맞지 않자 중국의 소행이라는 보고를 받았는데 사태 파악도 안하고 독단으로 중국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상당수의 거짓말과 본인의 출세를 위해 일본 정부를 무시했다고 볼 수 있다



싱가포르 전투


1940년에 중장으로 진급한 무타구치 렌야는 18사단 사단장으로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했는데 싱가포르 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을 맞아 부상당했다 이 부상도 엄청 황당한데 부대에서 술 잔치를 벌이다가 날라온 포격을 피하려고 도망갈 때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해서 숨다가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18사단은 싱가포르 함락 후 필리핀의 바탄 반도에 이동했으며 1942년 4월에는 버마 전선으로 다시 돌아왔고 1943년 3월에는 15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버마를 지키는 일본군 제15군 사령관이었을때에도 인도의 영국군이 버마를 공격하자 생각을 바꾸어 인도 진공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 조지프 스틸웰이 버마 탈환 노래를 부르며 병력을 모은 인도군, 영국군이 병력을 전열하고 재편했던 상태에서 추진했다는 것이다



임팔 작전 관련 일화들


일본군이 임팔 전선에서 전황이 나빠지던 당시에 무타구치 렌야는 일본군 전선 지휘부 옆에 기생집을 차린 뒤에 무조건 오후 5시 땡~ 하면 업무를 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며 놀며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전선의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전선 지휘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서 사령부 옆에다가 제단을 쌓고 신불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느라 그나마 주간에 하던 업무 처리조차 다 뒤로 밀어버렸다 게다가 이 소식을 영국군이 알자 "야! 니네 부대 사령관은 니네가 굶을 때 번화가에 있는 기생집에서 여자 끼고 논다며? 너희는 왜 싸우냐? 이 땅에서 꺼져!" 라고 조롱했다 무타구치 렌야의 행동으로 인하여 일본 제15군 전체가 국제적으로 개망신 당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스기야마 하지메(일제 일본 육군 원수)

(1880년 1월 1일 ~ 1945년 9월 12일)


"일제의 고위급 독립군 밀정"


일본 패망을 앞당긴 넘버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무타구치 렌야의 활약으로 한국과 더불어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는 묻힌 인물이라고 볼 수 있고 일본 내부에서는 삼대오물의 한 명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태평양 전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손님으로 회자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일본 제국의 패장들을 무조건적으로 쉴드 쳐주는 현대 일본의 극우세력들마저도 삼대오물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스기야마 하지메 막장의 시작


"중국은 1개월이면 전역을 정복 할 수 있다." 라는 논리를 펴 주전파로 들고 일어나 중일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일제의 관동군은 중일전쟁 초기에 기세 좋게 중국으로 밀고 들어가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과 옛 수도 베이핑(현 베이징)을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하지만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국공합작으로 단결하자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국 배후 지역의 게릴라에 시달려야했다



도조 히데키의 진주만 공습 옹호


1941년 9월에 석유 수출과 대 미국전을 계획하는 어전 회의에서 스기야마는 도조 히데끼와 함께 작전을 설명하며 "진주만 공습 뒤 미국은 3개월이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을 것" 이라고 덧붙였으며 이때 당시 일본 제국의 천황 히로히토가 스기야마에게 반대의견을 내보였다


고노에 후미마로가 수기로 기록한 히로히토와 스기야마 하지메의 당시 대화의 내용이다


히로히토 :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일이 터지면 육군은 어느 만큼 기간 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 하시오?


스기야마 : 남쪽 방면만 한다면 3개월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히로히토 : 스기야마 그대는 중국사변 발발 당시 육군대신이었소. 그때 그대가 중국사변 이후 우리 일본이 중국을 1개월 정도면 정리 할 수 있다고 한 말을, 짐은 아직 기억하오. 그렇지만 4년이나 질질 끌었고 아직도 정리를 못했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스기야마 : 중국은 오지가 넓기에 예상과는 달리 작전을 못 폈습니다. 허나 폐하, 태평양은 도서지역이기 때문에 더 수월할 수 있습니다!


히로히토 : 뭐요? 중국의 오지가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소이다! 대체 무슨 확신이 있어 3개월이라는 소릴 하는 것이오


- 쇼와사, 한도 가즈토시



임팔 작전의 결재


무타구치 렌야의 임팔 작전을 최종 승인은 도조 히데키가 했는데 대부분의 참모장과 작전과장이 무타구치의 작전에 '이건 현실적으로 가능한 작전이 아닙니다.' 라고 반대했으나 스기야마는 이렇게 말하며 결재를 통과시키라 명령했다


"작전 입안에 참여한 무타구치 장군과 데라우치 장군의 얼굴을 봐서라도 결재해 주게."


일본 육군의 최대 파벌이었던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출신의 파벌이라서 어설프게 확인하고 승인했는데 그 결과가 인도차이나 남방 전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1945년 초에 영국,인도군과 버마 국방군에게 지고 인도차이나에서 완전히 철군을 했다




도미나가 교지(일제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

(1892년 1월 2일 ~ 1960년 1월 14일)


군사적 역량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신이 내린 줄타기 능력이 있는 인물로 육군대학을 졸업한 이후 도조 히데키 라인으로 도조의 돈주머니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육군성 인사국장을 거쳐 육군 차관까지 오른다 하지만 1944년 8월에 도조 히데키가 실각하면서 자리를 내 놓게 되는데 도미나가 교지의 이력을 보자면 베트남에서 전투를 벌였을 당시 18,000명의 일본군 중 400명만 남기고 전멸을 시킨 전적이 있으며 어이없는 사실을 하나 소개하자면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루는 당시 지휘는 고사하고 사단 본부에서 기생과 놀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적으로 인해 1944년 당시에 가장 안전한 남방 전선의 일본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닥치고 카미카제


남방부 전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지만 도미나가 교지는 항공군을 지휘한 경력이 전혀 없었고 1944년 9월에 카미카제 허가 명령이 떨어지고 총 62차례의 특공을 시도하여 전투기 400여 기를 버렸고 이로 인하여 미군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한 육군 제4항공군의 항공 전력을 반 이하로 떨어트려버렸다



전설의 적전도주


1945년 1월에 영국, 인도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공해 미얀마까지 탈환하였을 때 태평양의 미 해군은 필리핀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1945년 1월 16일에 도미나가 교지는 위궤양이 악화 되었다면서 수송기를 타고 타이완의 타이베이 기지로 이동한다 그 와중에도 총애하는 기생들을 잊지 않았으며 수송기에 남은 공간에 위스키를 실어 담았다 이러한 도미나가 교지의 도주로 인하여 일본 육군 제4항공군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고 1945년 2월 13일부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카미카제에 사용하지 않았던 전투기 500여대에 대해서는 필리핀을 탈환했던 미군 공군에 편입되었고 도미나가는 도망쳐 온 입장에도 대낮에 군용차에 기생을 태우고 다닌 데다가 위궤양이 심하다며 온천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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