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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간사우' 일제의 패망을 앞당긴 도조 히데키의 측근들

똥베이런 201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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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부에서 말하는 삼간사우삼대오물은 현대에 들어서 일본에서 사용하는 말로 삼간이라는 말은 세 명의 간신배를 말하며 사우 역시 네 명의 어리석은 놈을 가르키는 언어라고 볼 수 있다


▲항복이후 재판결과를 듣고 있는 도조 히데키▲


삼간사우는 도조 히데키의 최측근이었으며 도조 히데키의 보호를 받아서 활약상이 눈에 띄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삼대오물보다는 취급이 덜하고 한국을 포함하여 중국, 필리핀 등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자들이지만 무능했던 자들임은 틀림없고 이들은 일본의 우익단체들에게도 외면받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삼간 (3명의 간신배)



스즈키 데이이치

(1888년 12월 16일 ~ 1989년 7월 15일)


일본 지바 현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도조 히데키 측근 3간 중 한명으로 여기고 있는 인물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 독단적으로 만주 정책을 추진한 인물로 국제연맹 탈퇴론을 주장한 인물이고 일본 군부에서 국제연맹 탈퇴 추진파로 알려지게 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고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았으며 1958년에 가석방되었다


가토 하쿠지로

(1889년 6월 8일 ~ 1951년 2월 19일)


가토 하쿠지로는 조선헌병대 사령관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1945년 북한에서 일제 항복의 소식을 들은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가토 하쿠지로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51년 2월 블라디미르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시가타 료지

(1896년 4월 28일 ~ 1977년 12월 13일)


시가타 료지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헌병대로 입대하여 1933년에 하얼빈 헌병대장을 거쳐 관동헌병대 사령부의 직원이 되었는데 당시 도조 히데키가 관동군 헌병사령으로 오면서 도조 히데키의 측근이 되었고 1942년 8월부터 도쿄헌병대장으로 위임하여 도조 히데키가 헌병통치를 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하였기 때문에 도조 히데키의 복심이면서 행동대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사우 (4명의 어리석은 놈)



기무라 헤이타로

(1888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23일)


"진짜, 인간이 아니다."


- 시마다 시게타로가 그의 만행을 보고 경악하며 남긴 말 -


현재 일본 내부에서 기무라 헤이타로를 평가하기로는 민간인 학살엔 유능하면서 정작 전투 때에는 무능했던 인물이라는 평가가 독보적이며 일본의 우익단체들도 삼대오물과 더불어서 기무라 헤이타로는 쉴드 조차를 쳐주지 않고 외면해버린다고 한다 일제의 항복이후에는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버마 인구 문제를 해결했다는 망언으로 화가난 미군정에서도 "이런 도살자 놈을 봤나! 반성해도 모자랄 판에 뭐? 니가 사람이냐?!" 라고 맞받아쳤다 11명의 판사 중 10명이 유죄로 인정했고 미국, 영국, 중국, 필리핀, 뉴질랜드, 캐나다, 네덜란드 7개국의 판사들이 사형에 찬성했다 



사토 겐료

(1895년 6월 1일 ~ 1975년 2월 6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미국 주재를 거쳐 일본 육군성군무 국장을 맡았으며 2차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에 삼간사우라고 불렸던 도조 히데키 측근 사우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는 종신형 판결을 받아 복역했으며 석방 이후에는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에 참가해서 화제가 되었고 죽기직전까지 면담자들이나 기자들에게 태평양 전쟁은 하나의 성전이었다는 주장을 하여 일본 국민들의 머리속에 삼간사우 중 한명으로 자리잡았다



사나다 헤이타로

(1897년 11월 21일 ~ 1957년 8월 3일)


육군대학교 출신으로 중일전쟁에 참여한 이력이 있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 자격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뒤에는 군무국장을 지냈고 일본의 패전 당시에는 제2군 참모부장으로 있었다 1945년 12월에 전역했고 최대의 특징은 삼간사우 중 한명으로 꼽힌다는 점인데 사실 무타구치 렌야의 임팔 작전 계획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인데 삼대오물의 넘버원인 무타구치 렌야의 계획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을 보면 일본 내부에서 인정한 어리석은 사람이 봐도 노답인 작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추가로 무타구치 렌야가 왜 한국측으로부터 일본에 있는 독립군 밀정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카마쓰 사다오

(1900년 5월 21일 ~ 1982년 8월 16일)


육군대학교 출신으로 도조 히데키의비서관 역활을 하게 되는데 도조 히데키가 육군대신이 되자 육군성부관 겸 육군대신 비서관으로 근무하였고 도조 내각에서는 내각총리대신에 비서관이 되어 재계와 정계를 연결하는 파이프 역활을 하였다 1945년 당시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하다가 패전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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