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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대한 조국을 위한 희생 위대한 독립운동가 6인

똥베이런 201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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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맞서 대항한 조선민족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6인에 대해 뽑아 봤는데요.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인물들에 대해서만 설명해드리는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라며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바쳐서 싸운 독립군 모든분들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김구(Gim Gu)


대한제국(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인이며 정치인입니다. 동학농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1919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현재 한국정부의 기반이 된 임시정부청사의 수립에 참여 하였으며 1940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된 상해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이후 당시 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는 점에서 흔히 이승만의 라이벌로 회자 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에서 꾸준히 1위를 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은 해외거주 한인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데 해외 한인들이 모아서 보내주는 독립자금으로 친일파 암살계획과 군자금 모집에 관여 하였다고 합니다. 1930년부터 3년간은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더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한인애국단 소속의 대표 독립운동가들은 이봉창,윤봉길 등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범 김구선생은 1949년 6월 26일에 사망하였는데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도산 안창호(Ahn chang-Ho)


MBC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 미국 LA특집 편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해 방송을 내 보냈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은 농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며 광복 이후에는 남한의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의 경우 미국 한인1세대를 미국에 자리잡게 해준 장본인이며 해외거주 한인들이 모은 독립자금을 전달하여 상해임시정부 건물을 임대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활을 한 장본인 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37년 6월 28일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건강악화로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경성제국대학교 부속 병원에 입원하여 59세의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38년 3월 10일에 별세하여 조선의 독립은 보지 못한채 눈을 감았으며 1973년 서울특별시에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도산공원에 합장되었다고 합니다.




백야 김좌진 (Gim Jwa jin)


백야 김좌진 장군은 광복 이후 당시 국회의원 김두한이 청산리대첩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이 자신의 아버지라 주장하였으나 일부 사람들은 김두한 의원의 주장을 믿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며 김좌진 장군의 집안은 명문 양반가 집안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부친을 여의고도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고 하며 모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합니다.



일단 백야 김좌진 장군의 죽음은 암살 당해서 죽음을 맞이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김좌진 장군의 암살은 공산주의자들의 암살로 여겨졌으나 암살사건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김좌진 장군의 암살 뒤에는 꽤나 복잡한 배경이 있다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인물로는 박상실이라는 인물로 지명되었는데 박상실은 김좌진 장군이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일하던 일꾼이었으며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후 김좌진 장군의 장례식에서 밝혀진 바로는 박상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이자 재중 한인청년동맹원으로 밝혀 졌는데 박상실의 본명은 공도전 또는 이복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박상실의 소속단체를 보았을때 공산당원이라는 주장은 확실하지만 박상실의 본명에 대해서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홍범도 (Hong Beom-do)


일단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여 상당한 활약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데 홍범도 장군의 인생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 한 인생을 산 인물이라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시절에는 일제강점기 시절이라 러시아 또는 중국으로 도망가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는데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 독립운동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장소가 블라디보스토크라고 하며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는데 일본군이 이 기회를 틈타 연해주 및 만주지방에 있는 조선독립군 단체들을 소탕하려고 하였는데 그 때 공산주의 독립운동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광복을 불과 2년 남겨두고 소비에트 연방(현 러시아)에서 사망했는데 그래도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 사이에서는 고려인 1세대의 영웅으로 기억 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 잘 알려진 김좌진 장군이 우파 인사였다는 것 때문에 중국 내 한인 사회(조선족 및 중국거주 재 한인)들에게는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으로 김좌진 장군보다는 홍범도 장군을 더욱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봉창(Lee Bong-Chang)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사나이로 기억되고 있는 이봉창 열사는 히로히토 암살 미수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31살에 안중근 열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상해임시정부에 대해 알게 되어 상하이로 떠나 독립운동에 대한 의사를 밝혔지만 능숙한 일본어와 일본인 같은 제스처 때문에 임시정부청사 직원들에게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화로는 백범 김구선생이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받는 이봉창 열사와 여러번 대화를 했는데 여러번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봉창 열사가 의거 때 사용한 수류탄은 김홍일 장군(왕웅)이 만들었다고 하며 이봉창 열사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도 김홍일 장군이라고 합니다. 김홍일은 장군은 1931년에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는 등 중국군의 병기를 관리 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알려져있는데 이봉창 열사는 마미라는 수류탄을 사용했다고 하며 휴대가 간편하고 멀리 던질수 있으며 불발탄이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폭발력은 다소 약했다는 단점도 있다고 합니다.



윤봉길 (Yoon Bong-gil)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하기 전 백범 김구선생에게 말 한 명언이 있는데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는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일이 없으니까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계는 효창공원 내 백범 기념관에 전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일본 군민 관료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게 한것은 좋았지만 나머지 폭탄의 불발로 결국 붙잡혀서 순국 하였으며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순국 이후에 김구 선생의 지시로 인하여 박열 의사가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하며 여담으로 1994년 일본의 시민운동가 야마구치 다카시가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 라는 책에 있는 내용을 보면 일본군은 사실 윤봉길 의사를 현장에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이 침략군이라는 언론조성 이미지 때문에 일본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시카와(현 카나자와) 형무소에서 형을 집행하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25세의 어린 나이에 순국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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