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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속 위대한 군사지휘관 5인

똥베이런 2016.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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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국은 외부 세력의 침략이 자주 있었던 나라인것을 보았을 때 외부세력의 침략을 막은 위대한 군사지휘관들이 있습니다. 물론 한국사람이고 한국 역사를 공부했던 사람들은 다 아는 한민족을 구한 위대한 군사지휘관 5인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1545년 ~ 1598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나라 침략을 계기로 조선에 땅을 빌려달라 요구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요구를 묵살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조선수군을 이끌고 일본수군을 모두 격파하여 42전 42승의 무패를 달성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일본수군이 일본 본국에서 나르던 물자 보급로를 모두 차단당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전쟁 실패의 종지부를 찍었던 임진왜란 3대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을 역사학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전쟁의 실패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조선의 모든 군사지휘관들이 전국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의 보급로를 모두 차단한것이 일본군의 조선침략전쟁의 결정타라고 한국 역사학자를 포함한 일본 역사학자들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을지문덕 (? ~ ? 생몰년도 미상)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출생년도와 가문이 불 확실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을지문덕은 당시 고구려 영양왕 시절의 고구려 막리지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역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으며 당시 중국 통일왕조 국가인 수나라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많이 변화 하였으며 수나라의 1차,2차 고구려 침략전쟁으로 국제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당시 막리지(고구려 재상)이었던 을지문덕이 고구려-수나라 전쟁에서 고구려군의 총 지휘했을 것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국사책에서는 을지문덕 장군을 살수대첩으로 수나라 수군 30만명을 살수에서 수장 시킨 고구려 장군으로 만 알려주는데 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 군의 총 지휘관으로 수나라 백만대군을 막은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양만춘 (? ~ ? 생년몰도 미상)


양만춘 장군은 고구려 안시성의 성주이며 고구려 영류왕 ~ 보장왕 시대의 장수입니다. 고구려 침공으로 모든 국력을 잃어버린 수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의 새로운 왕조 국가인 당나라가 들어서게 되는데 645년에 당태종 이세민이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던 제1차 고-당 전쟁 당시 안시성에서 격파한 명장입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이 자세하게 있는 반면에 양만춘 장군은 기록이자세하게 없으며 기록이 있다면 당태종과 싸웠다는 기록을 제외하곤 기록이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당나라 전투의 서막이라고 하면 645년 3월에 당태종 이세민은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침략을 했는데 전쟁 초기에는 요동지방의 성들을 차례대로 함락하여 승승장구하던 중에 안시성에 도착하였으나 난공불략의 성 안시성에서 발이 묶힌 상태로 결국 겨울이 찾아 왔고 겨울에 유난히 추운 요동지방은 물과 풀이 얼어서 식수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의 최악의 조건인데다 당시 몽골 고원의 강자인 투르크 계민족인 철륵의 설연타가 당나라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버티다 못한 당태종 이세민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안시성에서 전투가 일어난지 무려 3개월 만에 일이었다고 하며 그 때가 645년 9월 이었다고 합니다.



권율 (1537년 ~ 1599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아 수행했던 조선의 장군입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권율의 집안 자체가 뼈대 있는 양반가 집안인데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던 권철이었으며 서애 류성룡의 추천으로 인하여 출세한 인물입니다. 권율 장군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서 파직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는 권율이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기용하여 전라도 광주목사로 부임했다고 합니다.



행주산성대첩(육지판 명량대첩)이 있을 때 권율은 당시 전라도순찰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며 행주산성에 주둔 당시 지원을 올 줄 알았던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에서 참패하고 행주산성의 병사들도 1만명 미만이어서 위태로운 형세였으나 일본군 지휘관이 우키타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찰력과 지휘력이 병맛수준이라 적은 병사만으로도 3만의 일본군을 격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시민 (1554년 ~ 1592년)


일단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 진주판관에 임명 되었는데 임진왜란에서 죽은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강화하여 성을 지킨 인물입니다. 전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의병장인 곽재우 등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여러차례의 적의 공세를 물리치고 창원과 고성 등을 회복한 공로로 진주목사에 임명 되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일본 군의 보급로를 모두 차단한 상태에서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일어나는데 보급로가 끊긴 일본군이 전쟁을 하려면 식량 조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지방으로 진격하기 위해서 진주성을 공격하였으며 진주 목사 김시민은 3,800명의 조선군을 데리고 3만 일본군과 싸워 진주성을 수성하였습니다. 곽재우,최경회 등의 의병들이 일본군의 배후를 습격하여 진주성 수성에 힘을 보탰으며 성 안에 있는 조선백성들과 합세하여 수적으로 많은 일본군의 공세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주목사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에 일본군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으며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해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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