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장성의 회고록으로 보는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는 대한민국 국군 초창기 장성 중 한명이었던 이형근 장군의 회고록인 '군번 1번의 외길'을 월간 중앙에 연재된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1.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또는 무시했다는점
6.25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부터 5월까지는 내가 지휘한 8사단 뿐만 아니라 다른 사단에서도 적의 대규모 남침 징후가 보인다는 보고가 잇따랐을 것이다. 8사단의 경우 1950년 3월부터 5월까지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이호재 부대의 잔당과 김무현 유격대를 토벌하던 중 생포한 포로들을 심문했다. 그 결과 이구동성으로 적의 대규모 남침을 거듭 예고 했기 때문에 해당 정보를 육군본부에 수 차례 보고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2. 각 부대 주요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인사이동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 전 중앙요직을 포함한 전 후방의 사단과 연대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중요한 것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인사를 단행한 것이 문제였다는 점이다.
3. 전,후방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1950년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친 전, 후방부대 교대 역시 부적절한 조치였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들이 정찰이나 지형은 커녕 부하들의 신상파악 조차 할 수가 없었다. 2번과 일맥상통한데 부대교체도 조금씩 해야하는데 너무 한꺼번에 많은 부대를 동시에 교체하는 바람에 전력공백을 야기했다.
4.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하여 남한은 6월 11일부터 6월 23일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림
이유를 굳히 들자면 1950년 6월 10일 이른바 <조국통일투사 체포사건>에 대해 평양상봉이 맹렬하게 비난과 무력행사를 위협해 해왔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6월 23일 김일성이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도록 결정된 날 자정에 비상경계령을 해체한 점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북한측은 남북협상을 위해 특사 3명을 파견할 것이니 남측에서 메세지를 받으라 했고 남한측은 이들을 28도선 남방 1km 지점에서 받아 메시지를 인수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엔감시위원단에게도 수교 할 문서가 있다면서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섰고 남한 경찰들이 이들을 체포했는데 북측은 즉각석방하지 않으면 강력한 무력행사를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렇게 남측과 북측이 티격태격거리고 있는데도 육군본부는 6월 24일 자정부터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한 것이다.
5.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주었다
정말 황당한 것은 육군본부 정보분석과에서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취를 취했던 것이다.
6.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 24일 밤에 열렸다
육군 장교클럽 낙성파티를 연다고 전방과 후방 고급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참석 장교들은 6월 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으며 일부 미 고문관과 한국 장교들은 2차를 가기도 했다고 한다. 나도 초청장을 받았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엉뚱한 것이어서 불참했다.
7. 서울 북방에 축차투입해
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6.25 발발 이후 육군본부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지만 군사적 기초상식을 깬 작전지도였다.
8. 6월25일부터 27일까지 남한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 방송을 하였음
정부는 허위방송을 함으로써 남한군 사령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서울 북방에서 접전중이던 국군이 상황판단을 제대로 했다면 육군본부는 그들을 재 빨리 전장에서 후퇴하게 한 후 다음 작전에 대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9. 남한측의 한강교 조기폭파
전술의 원칙 상 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추격군이 감행하는법이다. 하지만 한강교는 남한측이 그것도 한강 이북의 군국만 믿고 있는 많은 시민들과 그리고 병력과 군수물자를 방치한 채 서둘러 한강교를 폭파했다. 더군다나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고위급관료, 육군 참모총장이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한강 이남으로 도피한 뒤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이다. 전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납 될 수 없는 하책이며 반역 행위였으며 고관대작들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들만 슬그머니 빠져 나간뒤 탈출구를 봉쇄해버린 짓이다.
10.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 집행
최창식 대령은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하여 한강교를 폭파했을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년 9월 21일에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그때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시기였는데 이런 경황을 틈타 책임 소재도 가리지 않은 채 미리 처형한 것이었다. 물론 조기사형은 정치적 복선이 있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6.25 한국전쟁 발발 이후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게 된 근본적인 것을 따지자면 미국의 오판이 가장 컸다. 미국은 애초부터 자신들의 압도적인 국력을 과시한 나머지 전투대비태세가 부족했다. 특히 1950년 1월 21일에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공표한 것은 적에 대한 초대장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남한측 국군 수뇌부들의 잘못이 관과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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