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군 3개 핵심조직들

똥베이런 2016.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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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군은 하나의 단체라고 단정짓는 것보다 일제에 저항하거나 일제와 무력으로 대항하는 준군사조직의 통칭이며 독립군 핵심조직들은 1910년 이후로 일제의 영향이 약한 만주로 근거지를 옮겨갔으며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고 해외에서 조직하여 만주의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을 보내주는 한인1세대 이주민들의 독립군 단체들도 있었으나 국내와 만주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조직들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한국 임시 망명정부)


임시정부 선포일 : 1919년 4월 13일


장소 : 중화민국 상하이 시


1차세계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고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였으며 세계 각 국의 회의에 참여하자 조선이 일제에게 강제 식민지화 당했다는 것이 전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이 생겼고 고종의 사망으로 3.1 운동이 발생하였다 민중 운동의 결과로 상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각종 의논을 마친뒤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경우에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공식적인 한국 망명정부였으며 만주 일대 및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항일무장 세력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일제의 주요 관직의 인물들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의 모든 계획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계획해서 진행 한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서 상해 임시정부가 백색테러를 하는 집단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을 분명한 친일파 후손들이 주장하는 의견이라고 판단 할 수 있으며 대체적으로는 일제강점기 당시 상황이나 현재 국민들은 조선왕조 이후 한반도의 직속계통은 상해 임시정부로 판단하고 있다



의열단(일제 주요인물 암살 및 일제 산업시설 파괴 등 항일조직)


발족일 : 1919년 11월


의열단장 : 약산 김원봉


주요이력 : 연쇄적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 및 공격 등 일제 주요인물 암살


의로운 바를 맹렬하게 실천하는 조직으로 191년 11월에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이다 대체적으로 의열단장으로 알려져 있는 김원봉은 3.1 운동으로 인하여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주요인물에 대한 암살, 상업시설 파괴 등을 전개함으로써 독립 운동 단체들 중에서는 가장 활발하게 일제에 대항하던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의열단의 창단 당시 멤버로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고 총 13명의 단원들로 구성하였다



의열단 창단 멤버 13명 중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고 하지만 암살과 테러를 위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서 작전의 실행에 있어서 허술한 점이 많아 암살대상의 자택 앞에서 귀가 할 때 술을 마시다가 졸아서 놓치는 등 실패할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상당한 전과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 하였으며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김원봉이 해방 이후 남한으로 들어왔지만 당시 미군정의 통치를 받고 있던 시절이라 빨갱이로 몰렸고 빨갱이로 몰리는 바람에 월북하여 김일성과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지만 1958년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김원봉은 중국에서 활동했다는 것 때문에 공산당과 협력한 것이 있어 빨갱이로 몰렸고 미군정의 감시가 너무 심해서 월북했을 뿐이지 사회주의 인사가 아니라는 점이 김원봉의 증언에 담겨져 있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 무장부대 한국 광복군


소속 : 한국 상해 임시정부 소속 무장부대


총사령관 : 지청천


전투이력 : 2차세계대전 일부 버마전선에서 영국 육군의 요청으로 버마 전선 참전


1939년에 창군된 한국 독립당을 기반으로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중국 충칭에서 1940년 9월 17일에 한국 광복군이 결성되었다 초기 인원은 30명이였고 이후 징집을 통해 300명의 병사를 모집하였다 1942년 김원봉과 함께 잔류한 300명을 흡수하면서 군대의 기반을 잡았으며 규모는 1,000명 이하로 보고 있다 1920년대 만주 일대의 독립군은 약 4,000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게릴라 전을 펼치던 한국 독립군의 병력은 약 1,600명 정도였다 



한국 광복군은 상해 임시정부의 직속 무장부대로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에게도 어느정도 호의를 받던 부대였고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한국 광복군은 장비 또한 국민혁명군 육군의 지원을 받고 있어서 이들이 사용한 무기는 독일과 미국, 영국제 장비를 혼용하여 사용하였고 중일전쟁 중 대거 노획했던 일본군 병기도 상당수 사용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중국 국민당이 한국 광복군의 이름 아래 패전한 일본군 포로 혹은 항복한 광동군 부대 내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군사 세력으로 편입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광복군들 대부분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국방경비대 창설에서 광복군들 스스로가 반발하여 입대를 대거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지만 광복군 대부분이 한국 육군 장교와 부사관으로 입대하여 한국전쟁 때 한국 육군으로 활동하였다 현 한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한국 육군의 시초로 볼 수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야전에서 경력을 바탕으로 최전선에서 싸운 무장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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