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한국을 지원하지 못했던 이유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과 더불어 1950년 한반도에서 발발한 '한국전쟁'은 동아시아 역사를 완전히 바꾼 대형사건입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당시 중국 대륙을 통치하던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는 상해 임시정부와의 교류를 활발히하여 친분을 쌓았다고 하는데요.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장제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 병력을 지원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의 전쟁 승인을 받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북한은 침략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남한측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병하게 되는데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을 하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통일을 앞두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중국의 참전을 빌미삼아 중국 대륙에 핵 폭탄을 계획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 섬으로 이주한 장제스의 중화민국군의 중국 대륙 상륙을 계획했다고 하는데요.
'더글라스 맥아더'가 중국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해 중화민국(타이완)측과 군사적 협력을 진행했고 50만의 중화민국군의 화남상륙을 계획했다고 합니다. 즉, '더글라스 맥아더'는 중국 동북부에 핵 투하와 중국의 후방부를 공격하여 중국 공산당을 몰락시킬 계획이었던 것인데요.
하지만 '더글라스 맥아더'의 계획을 알아챈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은 3차세계대전으로의 전쟁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맥아더'를 해임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글라스 맥아더'가 계획했던 중국 동북부의 핵 투하와 50만 국민당군의 화남상륙은 실행도 못해보고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자리에 해임되자 미국 의회의 '청문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사령관의 자리에서 해임되었다고 하는데요. 군사전문가 겸 역사전문가들은 한국전쟁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의 해임으로 인해 이 작전이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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