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 알린 파란눈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똥베이런 2017. 6. 21.
반응형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당시 제암리 인근의 개신교와 천도교 그리고 유학의 지도자들이 계획하여 3월 30일 제암리 인근 주민 천여 명과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제암리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일본 헌병대는 시위 진압 목적으로 출동하였고 일본 헌병대는 제암리 마을을 습격하고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본 헌병대의 강제진압사태가 발생하자 인근 화수리와 수촌리 등의 천도교, 기독교 지도자들은 1919년 4월 3일 2차로 만세시위를 진행하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 한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일본 순사 한 명이 사망하자 1919년 4월 5일 일본 헌병대는 수촌리에 급습하여 만세시위 주동자들을 색출한다면서 마을 가옥 42호 중 38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수촌리에 거주하던 캐나다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이름 석호필)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 헌병대가 수촌리 마을에 교회안에 불을 질러서 교회안에 있던 22명이 사망하고 3명이 탈출했지만 2명은 사망, 한 명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 헌병대들은 수촌리 마을 주민들에게 인간으로써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했고, 석호필 교수의 목격담에 따르면 말 그대로 정말 최악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나자 석호필 교수는 학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제암리에도 넘어갔고 참혹한 실상을 목격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석호필 교수는 사진을 찍고 "끌 수 없는 불꽃"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전 세계에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폭로했다고 합니다.



일제 해방 이후 1959년이 되어 대한민국에는 석호필 교수(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자 석호필 교수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 당했다고 하는데요. 결국 1968년 대한민국은 석호필 교수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외국인으로써는 최초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랭킹월드 추천 글 링크>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한 대한민국을 보는 중국인들의 시각

한반도 왕조국가들을 대표하는 특수부대 4개

일본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군사전략가 7인

미국이 북한을 붕괴시키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 5가지

현재까지 대한민국이 발견한 북한의 대남땅굴


이 글이 재미있거나 유익하셨다면 로그인이 필요없는

아래에 있는 <공감> 버튼 한 번 눌러주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