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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암살범을 10년간 추적해 응징한 29살 청년

똥베이런 2018.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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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민족의 아버지라 불리던 '백범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었던 안두희의 총에 서거했습니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루어졌으며 엄청난 인파가 '백범 김구' 선생을 조문했는데요. 김구 선생 암살범을 10년간 추적해 응징한 29살 청년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대한민국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100만 명이라는 시민이 몰려들면서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국민장이 치루어지는 곳에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출신 어린 소년도 참여했다고 하는데요.



이 소년은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했을 당시 13살이었고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고 합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곽태영'으로 그는 '백범 김구' 장례식을 본 후 '안두희'를 죽여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백범 김구'의 장례식이 끝나고 10년이 흐른 후 '곽태영 선생'은 성인이되었고 안두희를 찾기 위해 안두희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안두희는 '백범 김구' 암살에 대한 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3달 만에 15년 형으로 감형되었고 한국전쟁 발발 후 한국전쟁에 참여해 2계급 특진을 한 후 사면되었다고 하는데요. 안두희는 군에서 제대한 후에도 군수품을 납품하는 군수공장을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큰 돈을 벌어들이던 안두희는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었고 곽태영 선생은 안두희의 주거를 찾아내 장사꾼으로 위장한 후 안두희의 집에 찾아갔다고 합니다.



곽태영 선생은 1965년 12월 22일 아침에 앞 마당에 나온 안두희 앞에서 '백범 선생의 시해 배후를 밝혀라'라고 외친 후 안두희에게 흉기와 돌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곽태영 선생은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3천만 동포의 원한을 풀어서 통쾌하다'며 웃으며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1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애국청년 곽태영을 석방하라'라는 탄원서를 냈고 곽태영 선생의 집에는 장하다라는 편지가 1만 통이나 왔다고 합니다.



곽태영 선생은 120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의 탄원서에도 불구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했다고 하는데요. 안두희는 곽태영 선생의 응징 이후 가명을 쓰면서 살다가 1996년 한 시민이 휘두른 몽둥이에 의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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