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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측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높게 평가해야하는 이유

똥베이런 2017.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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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에서의 조선군의 승리는 지휘관의 지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행주산성 대첩은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에 의해 묻힌 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임진왜란 당시 조선측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높게 평가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행주산성 전투는 일본군이 벽제관이라는 곳에서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면서 사기가 오르면서 시작되게 된 것인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수세에 밀리고 있었던 것을 만회하고자 사기가 오른 기회를 삼아 조선군의 한성 탈환을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군의 사기를 더 올리기 위해 시범타로 약세에 몰린 곳을 공격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와중 일본군은 행주산성 근처에 소규모의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대를 움직여 행주산성 근처에 집결하게 됩니다. 집결 이후 일본군의 수는 대략 3만 명으로 3만 명의 대규모 군대는 행주를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의 지휘관은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막은 '권율' 장군이었는데요. 당시 권율 장군이 지휘하던 조선군은 2,880명이었고 의병장 김천일, 승병장 처영의 의병을 포함한 숫자였다고 합니다.



또한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총대장은 일본에서도 네임드급으로 유명한 우키타 히데이데와 히데요시의 오른팔 격이라고 하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참전했다고 합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그야말로 일본측 정예 네임드급들이 대거 참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시다 미츠나리는 실제로 일본군이 본토 철수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일본 전국을 두고 맞대결을 펼쳤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군 3만 명은 조선군 약 3천 여명에게 대패를 당하고 후퇴하게 되는데요. 그 결과 조선군이 행주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명나라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조명연합군은 한양을 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율 장군이 '도원수' 자리에 임명되게 되는 결정적인 전투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행주대첩'을 높게 평가해야하는 이유는 일본 네임드급들이 대거 참전했고 10배가 넘는 열약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는 부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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