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얻은 장군의 최후

똥베이런 2017. 8. 9.
반응형


1592년 5월 23일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벌 야욕을 숨기지 않고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당시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기요마사는 부산 동래성을 순식 간에 점령하고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선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한양으로 진군했습니다.



일본의 빠른 진군을 막기 위해 조선 조정은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었던 신립을 필두로 8천 명의 조선군을 조직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립은 조총의 위력을 무시하고 평원에서 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고 결국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 8천 명은 전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의 도원수였던 김명원은 선조의 명에 따라 한강 방어임무를 맡았지만 병력을 빼서 재정비를 시도하면서 한강 방어에 실패했다고 하는데요. 이에 한강 방어에 실패하자 도원수 김명원은 병력을 수습한 후 경기도 양주로 후퇴한 후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했다고 합니다.



당시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 방어임무를 했던 인물은 부원수 신각이라는 장군인데요. 신각은 도원수 김명원은 지휘관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양주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에 합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도원수 김명원은 선조에게 신각이 도망갔다는 장계를 올렸고 선조는 신각이 군율을 어긴다고 생각해서 신각의 처형을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신각이 이끄는 조선군은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일대였던 해유령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해유령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신각은 왜군 70명을 기습하여 전부 사살했고 이에 신각이 이끄는 조선군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초의 승리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신각은 해유령에서 왜군 70명을 사살했다는 것을 선조에게 알렸지만 선조에게 해유령 전투의 승전이 알려지기 전 신각은 이미 처형된 뒤였다고 합니다.



선조가 신각 처형 명령을 할 당시 당시 류성룡은 신각의 처형을 막으려고 했지만 막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해유령 전투 당시 조선 조정 자체가 패닉에 빠진 상태이다보니 보고체계만 확실히 되었더라면 신각이라는 명장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신각이라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장군은 정말 재수없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장식한 장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랭킹월드 추천 글 링크>

고구려는 어떻게 수나라 별동대 30만을 몰살 시킬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 공군이 강력한 공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

대한민국 국군 창군 역사 상 가장 최악의 사건

국군 사병의 말을 듣지 않아 생긴 한국전쟁 당시 레전드 사건

AK-47 소총에 대한 당신이 몰랐던 사실 4가지


이 글이 재미있거나 유익하셨다면 로그인이 필요없는

아래에 있는 <공감> 버튼 한 번 눌러주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