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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임진왜란 당시 왕세자 광해군을 재평가해야 할까?

똥베이런 2017.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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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일본의 침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선조의 무능함을 보여준 사건으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조의 무능함으로 광해군은 국왕을 대신해 왜란을 극복한 지도자로써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왜? 임진왜란 당시 왕세자 광해군을 재평가해야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592년 정명가도(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라는 요구를 조선 조정에서는 거부하였습니다.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자 일본 전국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조선 반도를 침공했습니다.



결국 개전 이후 신립이 이끌던 8천의 조선 정규군이 일본군에 의해 전멸 당하자 조선의 임금 선조는 수도 한양과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임란 도중 광해군은 왕세자에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의병을 독려하고자 했고 선조는 죽어도 명나라에서 죽겠다라는 발언을 하면서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왕세자 광해군은 이천을 분조 주둔지로 결정하고 조선 각지의 의병들을 독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광해군은 당시 조선의 국왕의 자격으로써 백성들을 독려했고 결국 조선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왜군을 크게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호남 일대의 의병들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막기 위해 조선 정규관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 받으며 전투에 참여했는데요. 이러한 의병조직의 활약으로 인해 뚫리기 일보 직전인 권율의 조선 정규군을 구하면서 호남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결국 광해군의 의병 독려를 통해 일본은 크게 밀리게 되었고 정유재란 이전에 조선 정규군은 20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동아시아 무적의 수군조직으로 평가받는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함대 역시 일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조선 의병과 연계하여 협동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 의병의 요청을 통해 조선 수군 역시 해상 폭격도 지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국왕에 오르자 친청정책과 더불어 조선 조정 내부의 정치적 문제 그리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궁극적 이유는 붕당정치에 대한 정치적 갈등이 큰 요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국왕이면서도 체계적인 군 시스템을 도입하여 왜군에 맞선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에서 폐위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사건을 극복한 인물이라는 점에 있어서 재평가 되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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