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실수로 추락한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최후
펑더화이는 192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인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공신으로도 꼽히고 있는 인물입니다. 대체적으로 펑더화이는 한민족의 참사인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원의 자격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펑더화이는 중국 공산당 홍군의 대장정에 참여하여 옌안까지 이동하였으며 펑더화이는 린뱌오(임표)와 함께 중국 공산당 홍군에서 가장 유능한 야전지휘관으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제2차 국공내전 당시에는 서북인민해방군(제1야전군)을 이끌고 중국 서부일대의 국민당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이끌어내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원에 임명하여 1950년 10월에 북한에 파견했습니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총사령원이었던 펑더화이는 참전 초기 중공군을 지휘하다 휴전협정이 협상단계에 이르자 1952년 귀국했습니다. 이후 휴전협정체결식인 1953년 7월 27일에는 공산군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해 휴전협정서에 조인하고 휴전을 체결했습니다.
펑더화이는 휴전협정 체결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 한국전쟁을 원점으로 돌린 공로를 인정받아 국방부장 겸 부총리를 맡았다고 합니다.
중국의 역사전문가들은 펑더화이는 한국전쟁 이후 이후 마오쩌둥의 군대정책을 탈바꿈시키려고 시도했다고 하는데요. 특히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전사 소식을 3개월 후에 보고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합니다. 펑더화이의 숙청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2가지 이유가 숙청의 가장 큰 빌미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펑더화이는 1959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열린 루산회의에서 자신을 비극적인 운명으로 몰아넣는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화에 대한 실패를 목격하고 서신 형식으로 대약진 운동과 마오쩌둥의 정책에 문제점을 전달하고 정책 전환을 요구했습니다.
펑더화이가 보낸 서신은 마오쩌둥의 지도권을 존중했지만 마오쩌둥은 서신의 내용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결국 마오쩌둥은 펑더화이가 보낸 서신을 비판하면서 회의 참가자들로부터 하여금 토론 의제로써 채택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펑더화이는 국방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서 해임되었고 이 해임은 국방부장이 된 린뱌오(임표)의 지위를 높여 문화대혁명의 단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홍위병의 공격대상이 되어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펑더화이는 결국 복원되지 못한 채 1974년에 암으로 베이징(북경)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펑더화이는 1978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펑더화이에 대한 재조사되면서 사면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덩 샤오핑에 의해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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