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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남긴 이유 6가지

똥베이런 2017.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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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영의정이라는 직책과 동시에 조선군총사령관의 직책을 맡은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집필하여 후대에 남기고자 했다고 합니다. 서애 류성룡이 무슨 이유 때문에 후대에 징비록이라는 임진왜란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록한 책을 집필했을까요?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남긴 이유 6가지



일본의 욕망에 대한 후대에 전달


징비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전 조선측이 왜국에 보낸 조선통신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이들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조선 조정에 거짓으로 보고했다는 것인데요. 징비록이 후대에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섬나라인 일본을 항상 견제해야한다라는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결국 한민족은 조선 말기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40년 간 나라를 잃기도 했습니다.



임진년에 일어난 대참사 대비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기록을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은 약 100년 간 전쟁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물론 서애 류성룡은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징비록에 후대에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은 항상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야한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전시상황시 국왕의 중요성


임진왜란 발발 초기 왜군이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를 지나 한양 근처에 도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몽진을 감행했습니다. 징비록의 기록에 의하면 임금님이 도성(한양)을 버리자 백성들이 궁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후대에 많은 한국인들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임금으로 선조를 꼽기도 합니다.



전란의 극복 결과 후대에 전달


임진왜란 중반부터 명나라의 원군을 포함한 호남(전라도)을 중심으로 조선군은 재편을 하게 되면서 반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왕세자 광해군은 이천의 분조를 기점으로 의병 봉기를 격려했다고 하는데요. 징비록의 기록에 의하면 왕세자 광해군이 백성들을 격려하고 어루어만져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조선 정규군을 제외하고 의병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변하였을지 모를수도 있다고 합니다. 즉, 백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나라를 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시상황에서 야전지휘관의 중요성


임진왜란 초기 도원수 김명원을 포함한 조선 정규군 야전지휘관들은 왜군에게 처절하게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도성(한양)을 함락당했는데요. 하지만 조선 중기에는 광주목사 권율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참고로 경상우수사 원균의 칠천량 해전만 봐도 야전 지휘관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국란 극복의 되풀이 대비


임진왜란 이후 징비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교훈이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징비록은 에도 막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인들에게도 역시 유명해졌다고 하는데요. 현대 한국의 역사학자들 역시 징비록의 교훈을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는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같은 한민족의 참사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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