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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 김충선 장군의 기록에 대한 논란 4가지

똥베이런 2017.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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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귀순한 항왜 장군 김충선(사야가)의 일생에 관한 자료는 모하당 문집이라는 기록서 입니다. 모하당 문집에는 사야가가 대병력을 이끌고 상륙 직후에 귀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하당 문집에 기록되어 있는 자료에 대한 논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항왜 김충선 장군의 기록에 대한 논란 4가지



사야가의 서신 내용


모하당 문집에 의한 사야가가 조선측에 귀순 할 당시 보냈던 서신에 대한 내용이 신빙성이 낮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서신 내용에는 유교사상을 근거로 백성을 해치지 않겠다라는 식의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인 무사들은 지식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에 서신을 보낼 때 승려들에게 서류 업무를 대행 시켰다고 합니다. 대체적으로 일본인 무사가 조선 유학자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조선식 문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다는 이야기입니다.



병력에 대한 기술 문제


김충선이 조선에 귀순 할 당시 3천 명에 가까운 왜군을 데리고 귀순을 했다는 것인데요. 일본서기에는 3천 명정도의 대규모 병력이 조선측에 귀순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항왜의 발생시점


김충선의 모하당 문집에 의하면 항왜의 발생시점이 임진왜란 발발 초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항왜의 발생시기는 명나라 참전 이후로 조선의 반격이 시작되었을 무렵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에 항왜가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입니다.



모하당 문집의 신빙성 문제


모하당 문집은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항왜 장군인 김충선 장군이 직접 쓴 기록입니다. 모하당 문집은 김충선 장군 사망 이후 분실되었다가 그의 6대 손에 의해 재 발견되면서 다시 간행했다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재 존재하는 모하당 문집은 행장류의 기록에 가깝다는 것이 현대 역사학자들의 결론입니다. 행장류의 기록은 후손들이 조상에 대한 숭모를 담아서 크게 미화하는 일이 잦은 기록이라 모하당 문집에 대한 신빙성에 한계가 생긴다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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