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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해방 이전까지의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

똥베이런 2016.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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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대역사에서는 동북아시아를 평정하며 만주지역을 지배했던 고구려와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을 지배했던 백제의 경우에도 대륙백제가 있었다는 설이 있으며 고려시대부터는 구체적인 군사조직의 기록이 나타났으며 일본제국으로 부터 독립하기 이전까지의 대한민국의 국군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제 해방이전까지의 한국 국군의 역사



고대 (고조선 ~ 삼국시대)


고조선시대의 군사조직에 대해 자세히 남아있지는 않으며 대체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유물을 통하여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비파형 동검과 세형 동검과 같은 청동검과 돌 또는 짐승뼈로 만든 화살촉을 사용했다는 정도이며 위만조선이 세워지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철기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철제무기로 무장을 하기 시작하였다삼국시대에는 군사문화에 대해 기록이 등장하는데 고대 삼국(가야 포함)에서는 중기병을 중시했으며 농경민족치고는 꽤 많은 수의 기병을 운용하였다 그 중에서는 개마무사라고 불리우는 중기병이 유명했으며 활로 무장한 경비병도 많았다고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방어거점으로 사용하고자 목책, 산성, 보루를 경쟁적으로 건설했으며 삼국시대의 전투양상은 야전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보다는 공성전이 주를 이루었고 성을 함락시키고자 운제나 포차같은 공성병기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신라 수군은 당나라 수군과 비교하였을 때 비교할만한 전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보고의 경우에는 일본승려가 당나라에 가기 위해 장보고에게 보호를 요청했을 정도로 남해-동중국해의 주도권을 잡았다 



중세 (고려시대)


고려시대부터 구체적인 군사조직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군사조직은 통일신라의 9서당 10정으로 687년(신문왕 7년)에 완성되었으며 고려의 경우에는 건국초기부터 북방의 거란과 적대적인 관계였으며 거란을 막고자 천리장성을 쌓아 송과 연결하여 거란을 압박했다 거란족은 수차례 고려를 침입하였는데 3차 고려-요나라 전쟁에서는 귀주대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거란은 거란은 고려의 정벌을 포기했다고 한다



13세기에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성장하는 몽골제국이 7차례나 고려를 침공하면서 고려는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고려군은 귀주성 전투, 처인성 전투, 충주성 전투 등에서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무신정권이 강화도에서 나올 생각을 안하고 본토에 지원을 전혀 안해서 고려군은 큰 피해를 겪었다 고려 말기에는 최무선이 화약제조법을 익히면서 화포를 비롯한 각종 화기류가 제조되기 시작했으며 제조된 화기류는 진포해전에서 사용되면서 500척의 왜구선단은 격퇴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근세 (조선)


태종 이방원때부터 조선은 화약무기개발에 주력을 했는데 그 결과로 천자총통, 지자총통, 황자총통 등 다양한 총통류와 화차같은 우수한 화약무기가 발명되었다 조선의 3대 국왕인 세종때에는 왜구를 근절하고자 함선227척과 17,285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마도를 정벌하여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던 3차례에 걸친 대마도 정벌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북방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한반도 전체가 조선에 완전하게 편입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에 조선군은 조총, 편곤 등 신무기와 대보병전술인 절강병법을 도입하였지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당시 조선군 지휘부의 판단오류와 기병을 통해 빠른 기동전을 감행한 청나라군에게 휘말려 치욕적인 수모를 겪는다 이를 보완하고자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다수의 보병+편곤과 활로 무장한 기병+화포수+일부 살수 위주로 가게되었으며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삼군부의 부활로 약간이나마 복구되나 그마저도 고종 친정 이후에는 사실상 무효화 되어버렸다



개항이후 (동학농민운동)


개항 이후에는 양반자제를 모집하여 신식무기로 무장한 별기군을 창설하지만 양반자제들이 훈련을 거부하는 등 문제를 보이다가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었으며 이후 장위영, 통위영, 총어영이 창설되면서 신무기로 무장시키거나 무분별하게 신무기를 도입해 보급과 훈련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것에서 확실하게 그대로 들어나버린다



개항이후 (갑오개혁)


1895년 갑오개혁 때 신무기로 무장하고 근대적인 편제를 갖춘 친위대, 진위대를 설치하면서 군제 개편을 시도한다 그러나 모병제로 운용된데다 재정이 부족하여 큰 규모를 갖추지 못하고 도리어 일제의 외압으로 1905년에 자국민인 을미의병을 진압하는데 동원되는 추태를 보이게 되고 일제의 압력으로 인하여 1907년에 군대해산이라는 수치를 겪게 된다



대한제국 시절


기본적으로 대한제국군은 서울의 시위대, 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황제 경호와 치안유지, 의병 탄압 등 왕권 수호를 위한 군대로 국방과는 거리가 있는 군대였으며 대한제국군의 군관은 신분제를 철폐했음에도 불구하고 양반출신만이 될 수 있었다 대한제국시절에는 청나라와 간도문제로 대립을 할 때 함경도의 진위대와 청나라 군대가 소규모로 충돌 했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도정치 시기부터 대한제국시절까지 한반도의 국방력의 최고 흑역사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일본제국의 강제 한반도 식민지화로 인하여 반일 투쟁을 하는 독립군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대거 이동하면서 독립군을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2차세계대전 때는 광복군이 활약하기도 했다 주로 군부군의 문화를 받아들인게 많으며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등 일제와 싸워 승리한 전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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