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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를 쳐부수자! 위대한 대한독립군 지도자 4인

똥베이런 2016.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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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의 강제 침탈로 인하여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들과 대한제국의 많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정신적 지주였던 대한독립군 위대한 지도자 4인데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백범 김구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일제강점기 시절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이며 1919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제국 임시정부를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는 상해 대한제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 되었다 기본적으로 백범 김구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으며 임시정부의 마지막과 처음을 이끌었던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상해임시정부에서 근무하면서 대한독립군을 포함한 대한제국의 국민들에게 정신적지주였으며 1949년 6월 26일에 백범 김구선생이 암살당하여 별세하였는데 백범 김구선생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진행되었다



백범김구 선생의 장례식은 치루는동안 일제 해방이후 최대의 인파가 몰렸다고 하는데 1949년 6월 26일부터 진행되었던 백범 김구선생의 장례식이 시작된 오후 12시30분부터 3일차인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명의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고 한다 당시 백범 김구선생의 장례가 10일장이었기 때문에 당시 조문객수는 2백만여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약산 김원봉 (대한독립군 의열단 단장 및 조선의용대 대장)


"수 많은 독립무장투쟁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계 무장독립투쟁의 전설임에도 김일성의 독재체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인물" 


김원봉의 경우에는 독립운동의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간 인물이며 1919년 12월에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단장)에 취임하여 일본제국의 행정기관 파괴, 일본제국의 주요인물 암살 등 다양한 항일투쟁을 한 인물이며 1930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혁명당원을 모집하여 조직,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하였다



김원봉의 경우 대한제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 것은 1942년이라고 보고 있는데 조선의용대에서 조선의용군의 분할이 일어나면서 1942년에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대한제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대한제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 김원봉은 한국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을 맡았으며 다만 김원봉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세력의 인사다 보니 임시정부 내부의 김구를 비롯한 민주세력들과 항상 마찰을 겪어 왔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김원봉에 대해서는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인사였지만 "진짜로 공산주의자 였는가?" 라는 의문점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핵심인데 1945년 8월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직후에 일본군에게 강제징집 당했던 '황용주' 라는 인물과 김원봉이 오랜시간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는데 황용주에 의하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으며 그는 김일성의 활동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당시에 월북하여 남북에게 버림을 받은 불운의 지도자였지만 대한독립에 대해서는 크게 평가받아야 하는 인물임이 분명하다는 점



도산 안창호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한 평생을 정직과 성실로써 살아간 당대 최고의 신사이자 민족과 청년을 진실로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교육자이자 대한제국의 비폭력 대표인사, 교육계 독립운동가의 독보적 인물이라고 불리는 독립의 원훈


1913년 5월 13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하였으며 이후 흥사단은 3.1운동과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비폭력 독립운동에 기여 하였으며 현재까지 이어져서 서울 동숭동을 거점으로 활동중이라고 한다

미국의 한인1세대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3.1운동으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려고 하자 모금으로 통한 성금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으며 1919년 4월 13일에 선포된 대한제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한국 초대대통령 이승만과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는데 당시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미국이 조선을 위임통치해 달라고 청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내 동지회를 이끌고 있었던 이승만과 안창호가 이끌고 있었던 대한인 국민회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면서 임시정부 안에서도 이승만계와 안창호계가 생겨나며 격렬한 암투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로 대립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쪽 고위층에게 "안창호는 공산주의자" 라고 주정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미국에 입국하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실적 팩트로 보자면 안창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므로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로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백야 김좌진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이 없구나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 광복회 부사령관을 맡았으며 대한광복회가 와해되자 이후에는 북간도(현 중국 연변시 조선족 자치주) 지역으로 건너가 북로 군정서군을 이끌었으며 이후 청산리전투(1920년)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이끌었다 자유시 참변이라는 사회주의 인사 vs 민주주의 인사 간의 싸움에 휘말려 무척 큰 피해를 입었으며 1921년에 반공노선으로 전향한 김좌진 장군은 볼모지나 다름없는 만주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방앗간 등으로 조선동포들에게 인심을 얻으면서 한족총연합회 주석을 맡는 등 만주의 독립운동에 지도자로 활약했다



김좌진의 경우에는 대한독립군에서도 대립되고 있었던 사회주의진영과 민주주의진영간의 대립에 대해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독립군 내부의 공산주의자에게 피격 암살 당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사회주의 인사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이고 무서운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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