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최초로 화포를 사용한 해전! 진포대첩

똥베이런 2016.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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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벌어지고 당시 정체가 불 분명한 왜구(일본의 해적세력)들이 고려의 전역을 유린하고 있을 무렵 고려 우왕 6년에 벌어진 대규모해전이며 당시 고려 남쪽지방을 어지럽히던 왜구를 격파한 전투로 황산대첩과 더불어서 고려 말의 전투로 유명하다



발생일자 : 고려 우왕 8년 1380년 8월


전쟁지역 : 충청남도 서천 (고려)


교전국 : 고려 vs 왜구(일본의 해적세력)


병력 : 고려측 군함 약 100척 vs 왜구측 군함 약 500척


결과 : 고려 수군의 대승



어떻게 왜구(일본의 해적세력)들이 500척의 대함대를 꾸렸나?


당시의 왜선 500척은 왜구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압도적인 규모에 속하는데 어떤식으로 대규모 함대가 등장했는지 확실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일본 큐슈지방의 남조세력이 다카기, 아마무카 일대의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또는 남조세력의 본거지인 기쿠치 일대가 포위당한 상황속에서 어떻게든 병량미를 얻기 위해 생겨났다는 의견이 있으며 진포대첩 당시 일본 남조는 북조의 큐슈공격이 시작되면서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었으므로 활로를 뚫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왜구들은 전략전술을 비롯하여 행동양식이 교육을 받은 군대에 가까웠다고 하며 일부에서는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기병을 운용할 때 유목민족이랑 비슷한 기록도 많이 발견되었다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통일왕조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가 되는 시기였는데 갈곳을 잃어버린 해양세력과 남조편에 섰다가 궁지에 몰린 왜구들이 최후의 명운을 걸고 고려로 진출했다는 가설도 존재하는데 분명히 해야할것은 진포에 나타난 500척 규모의 대 함대였다는 점이다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의 진포대첩 출현


최무선은 고려 말 무관출신의 고려군 장수였으며 당시 중국상인들을 보고 화포를 개발하였으며 최무선이라는 고려 말 무관이 화포개발에 대한 결실을 맺은것이 바로 진포대첩이며 사실 당시 고려조정에서도 중국에서 사용하는 화약무기에 대해 시험해보기도 했으며 화약을 만드는 노하우를 알게 되어 화포가 직접적으로 투입된 것은 우왕시기 진포대첩을 기점이라고 보아야한다 끝임없이 침입하던 왜구는 1380년 8월에 500척의 대규모 왜선이 진포어귀로 진입해 오기 시작했으며 고려측 해도원수(상원수)를 기점으로 부원수 심덕부와 최무선 장군이 함께 총 100여척의 고려함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화포를 장착한 고려의 함대가 대승을 거두다


왜구의 500척의 대규모 함대와 고려의 총100척의 고려함대가 한반도의 명운을 건 해상전투가 벌어졌는데 당시 압도적인 규모였던 왜군은 고려군이 화약이 있는지도 몰랐으며 또 함선의 숫자에서도 비교가 안되는 규모의 고려군을 보고 배를 한곳에 집결시켜 고려측 함선에 대해 돌격하였다 이 때 고려군의 화포가 불을 뿜어댔는데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 흘렀고 왜군은 거진 타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 자들도 많았다 이어 도주하기 시작한 왜군을 공격한 고려군은 큰 배를 9척이나 빼앗았으며 조선왕족실록 세종실록 12년 4월 14일 5번째기사에서 고려사의 기록을 따르면 왜구에게 잡혀진 334명의 고려인 포로를 구출해 내었다라고 적혀있다



진포대첩의 경우 분명한 것은 500척의 대규모 함대가 100척 밖에 되지 않는 고려수군에게 격파되었다는 기록뿐인데 고려군은 당시 신무기였던 화포의 힘을 빌려 위기에 놓였던 전황을 돌파해냈으며 압도적인 숫자의 왜선을 격파한 사례로 해상에서 왜구를 격파 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군사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고려 말에 일어났던 진포대첩에 대한 승리는 정말 거대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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