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외국인의 눈으로 본 일본이 '탄금대 전투'에서 승리한 이유

똥베이런 2018. 3. 3.
반응형


탄금대 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초기 1952년 4월 28일에 충청도 충주 인근 탄금대에서 일어난 전투입니다. 특히 탄금대 전투는 임진왜란 3대 패전에 속 할 정도로 뼈아픈 기록이기도 한데요. 외국인의 눈으로 본 일본이 '탄금대 전투'에서 승리한 이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을 비롯한 태합기의 자료를 비교해보면 탄금대 전투 당시 투입 된 인원을 대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과 태합기를 비교해보면 탄금대 전투 당시 투입 된 병력은 조선측 8천에서 최대 1만 6천 명, 일본측은 1만 8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외국인으로써 임진왜란을 기록한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에는 '탄금대 전투'의 기록이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탄금대 전투' 전투 진행 기록을 상세하게 기록했다고 하는데요.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탄금대 전투 당시 탄금대에 진을 친 조선 기병들이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반월진'으로 돌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측은 조총부대로 교차 사격을 했고 선봉진이 무너지면 조선측은 후퇴했다가 1~2차례 재공격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측 진영은 돌격하는 기마병을 상대로 조총 사격을 하다 선봉대를 붕괴시킨 후 긴 창을 든 창병을 투입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마병을 붕괴시킬 수 있는 일본 창병부대는 조직적으로 조선 기마대에 대항하여 조선군 진영을 붕괴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일본은 조총으로 기마대를 붕괴시켰다는 것보다도 기마대가 창병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창병으로 대항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탄금대 전투 당시 조선측 기마부대가 조총부대에 붕괴한 것이 아닌 창병에 붕괴했다고 보면 된다고 합니다.


<랭킹월드 추천 글 링크>

국가안보가 붕괴되면 절대로 안되는 국가 4개

북한 통일전선부장 '김영철'이 대한민국에 저지른 만행 3가지

한국전쟁 당시 미 해군 '제7함대'가 한국에 끼친 영향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살린 '맥아더 장군'에 대한 미국에서의 평가 3가지

한국인이 임진왜란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5가지


이 글이 재미있거나 유익하셨다면 로그인이 필요없는

아래에 있는 <공감> 버튼 한 번 눌러주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