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명량해전6 명량해전 당시 일본측의 피해규모는? 명량해전은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 12척으로 일본 수군의 대규모 함대를 막아 낸 전설적인 전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량해전 당시 조선측 피해규모와 일본측 피해규모가 불확실하다고 하는데요. 명량해전 당시 일본측 피해 규모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 1598년 2월 11일 자 기록에는 진해에 사는 정병 전풍상이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간 후 도망쳐 와서 한 이야기 한 것을 토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전풍상이라는 정병은 왜적에게 붙잡혀 포로로 한 달 정도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조선 조정에 그대로 말했다고 하는데요. 전풍상은 포로로 잡힌 후 일본군에서 복역하면서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왜적이 함선 120척을 거느리고 순천, 흥양을 거쳐 .. 밀리터리 2017. 10. 24. 더보기 ›› '명량해전' 당시 투입 된 일본측 함선의 정확한 수치 정유재란 발발 이후 조선 수군의 첫번째 전투는 바로 '명량해전'이었습니다. 명량해전 당시 조선측 판옥선은 12척으로 정확한 수치를 기록하여 후대에 알려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명량해전' 당시 일본측 함선의 수가 기록마다 틀리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중이라고 합니다. '명량해전' 당시 투입된 일본측 함선의 정확한 수치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에 의하면 명량해전 당시 일본측에서 투입 된 함선은 133척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시총사령관이었던 서애 류성룡이 집필한 에 의하면 에 기록되어 있는 133척과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에는 명량해전에 투입 된 왜선의 수가 200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또한 조선왕.. 밀리터리 2017. 10. 15. 더보기 ››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대단한 이유 6가지 1592년 조선 연합함대를 이끌며 왜군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은 바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으로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수군을 지휘했는데요. 결국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으로 인해 전투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대단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해상장악권 재장악 칠천량 해전의 대패 이후 명나라 역시 위협을 느끼고 명나라 수군 5,000명을 조선으로 급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수군의 재건과 남해안에 대한 해상장악권을 왜군으로 되찾아 왔는데요. 군사전문가들 역시 명량해전의 승리로 인해 남해안의 해상장악권을 되찾아온 것에 대해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보급 재.. 밀리터리 2017. 4. 24. 더보기 ››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왜선을 박살낼 수 있었던 이유 6가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역활은 상당히 중요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2차 백의종군을 하게 되면서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결국 원균은 군인으로써 정당하지 않은 군 통솔을 하여 칠천량에서 왜군의 습격받고 조선 수군의 전투 능력을 상실 시켰습니다. 칠천량 해전 이후 전투 기능을 상실한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어떻게 승리를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당파전술 칠천량 해전 이후 명량 해전 개전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당파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당파라는 뜻은 아군의 함선을 적선과 부딪혀 적선을 부시는 방법이라고 하는데요. 비교적 왜선보다 튼튼하고 높이가 높은 판옥선의 단단함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명량해전 당시 판옥선의 우수성을 이순신 장군은 적절하게 사용했다고 보고.. 밀리터리 2017. 3. 18. 더보기 ›› 한국 전쟁사 속 위대한 승리들 안녕하세요. 대첩이라는 뜻은 전쟁 중 또는 전투에서 아군이 적을 크게 이겼을 때 쓰는 말로 일반적인 전투보다 높은 단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대전과도 의미가 약간 겹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전쟁사 속 위대한 승리들 살수대첩 (612년) 612년 고구려 영양왕 시절 살수(현재의 청천강)에서 고구려 장군인 을지문덕 장군의 주도 아래 이루어낸 대첩으로 2차 여수전쟁의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이며 고구려 원정군 중 2,700명을 제외하고 궤멸당했다고 합니다. 수양제는 2차 고구려침공 이후 3차, 4차 침공을 계속했으나 결국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였으며 무리한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수나라가 패망하게 되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귀주대첩 (1019년) 1019년 2월에 고려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 밀리터리 2016. 12. 6. 더보기 ›› 반응형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