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독립운동가

똥베이런 2017.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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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일제의 강제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합병 당하자 한반도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은 만주로 이주했다. 또한 만주로 이주한 이들 중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떠난 사람도 수 없이 많다고 한다.



특히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라는 독립군 양성학교를 세운 이회영 6형제의 이야기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선 말기 당대 최고의 부자로 손꼽혔던 인물로 현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우당 이회영 선생의 집안은 이항복의 집안이라고 하는데 집안 대대로 관직을 지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특히 이회영 선생의 넷째 동생이 바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이다.



이시영 선생의 6형제는 경술국치 전후하여 6형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 재산을 급처하기에 이르는데 급처한 재산이 당시 소 13,000마리의 값이었다고 한다. 현재 시세로 따지자면 약 600억원 정도 되는 가치인데 게다가 다 팔지도 못하고 일부는 버리고 만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시영 6형제는 만주로 이주하여 그 곳에 자리를 잡고 독립군들을 후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있어서 아낌없이 독립군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특히 이시영 6형제는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만주의 현지 한인들과 신흥강습소 건립에 참여하였고 이후 국내와 연해주, 상하이 등의 독립운동조직에도 다수 참여,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특히 이시영 6형제는 독립운동 8년 만에 전 재산이 바닥이 나면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의 아들 이규창 선생의 자서전에는 "일주일에 세 번 밥을 하면 운수가 대통"이라고 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회영 선생의 6형제는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북로군정서 사령관 백야 김좌진과의 면담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회영 6형제의 독립운동에 대한 인재육성에 대한 의지는 상해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가들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전역으로 퍼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특히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 일부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라고 한다.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은 만주에서 활동하다 중국 대련 지역에 거점을 만들려고 했으나 밀정들의 활동으로 인해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옥사하였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국립현충원에 모셔졌다고 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기념관은 종로구 신교동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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