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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멸망을 막은 전투

똥베이런 201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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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멸망을 막은 전투는 홍천-춘천 전투라고 합니다. 또한 한국전쟁 발발 초기 북한군이 진격해서 들어오는 것을 중동부 전선인 춘천 지역에서 한국군 제6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북한군을 차단한 전투입니다. 북한군은 춘천-홍천 전투로 인해 남한 점령 작전인 '폭풍 작전'의 대부분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미군을 포함한 국제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 전투라고 하는데요. 사실 상 춘천-홍천 전투가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구축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전투의 서막


북한군은 한국전쟁 초기에 작전명 번개로 남한을 순식간에 적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개전을 앞둔 2주 전에 국군 6사단 사단장으로 김종오 대령이 부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단장에 부임한 김종오 대령은 6사단 전 간부/장병의 외출 외박을 전격적으로 통제하고 주둔지의 경계를 강화하면서 실전과 같은 전투 훈련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6사단은 북한군의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했고 진지를 구축하면서 지속적으로 정보수집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보수집을 지속하던 도중 강원도 화천과 인근 지역인 양구에 북한군 보병부대가 집결하고 수 십대의 차량이 집결한 것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춘천-홍천지구 전투 경과


1950년 6월 25일에 북한군이 남한측으로 밀고 내려오자 인민군 육군 2사단이 강원도 추천과 강원도 가평을 경유하여 서울 동남위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였고 북한군은 수도권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내려온 국군 사단의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는데 당시 인민군 12사단은 춘천에 주둔하고 있었던 한국 국군 육군 6사단 7연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후 인민군은 홍천지역을 지나 대전을 점령했고 대구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춘천지구


인민군 2사단 7연대는 국군 6사단이 구축해놓은 방어선을 뚫으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국군 7연대는 진지에 위치하여 방어선을 유지하였고 6사단 7연대 2대대 심일 소위 등 5명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인민군 대전차자주포 2문을 격파하였고 다급해진 인민군은 예비전력으로 데리고 왔던 인민군 17연대를 투입하였으나 국군 6사단은 이를 격퇴하였고 결과적으로 춘천지구의 전투만으로 인민군 2사단은 전투력의 40%를 상실하며 실질적으로 전멸했다고 볼 수 있다



인제-홍천지구


인민군 12사단은 인제와 큰말고개로 성공적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는데 국군의 입장에서는 적이 큰말고개를 차지함으로써 국군 6사단의 퇴로를 위협받게 되었다 하지만 인민군 2군단장 김광협 중장은 인제보다는 춘천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이곳을 점령하라고 지시를 내리게 되는데 인제 방향에서 남하해오던 인민군 12사단은 해당 방향으로의 진출을 멈추고 춘천방향으로 공격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큰말고개에 예비병력으로 남겨두었던 인민군 12사단 휘하의 연대가 북상하면서 춘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육군 6사단의 후퇴


한국전쟁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인민군이 점령하자 육군본부는 6사단에게 후퇴명령을 내렸고 인민군 2사단과 12사단에 의해서 춘천이 점령 당하고 만다 하지만 국군 6사단은 춘천이 점령당한 당일날 다시 원창고개를 탈환하지만 인민군의 투항을 가장한 기만전술에 당하여 원창고개를 빼앗기고 만다 이 전투에서 6사단 2연대는 큰말고개를 따라서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육탄 11용사의 활약으로 T-34전차와 적 자주포를 격파 또는 노획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6사단의 피해와 인민군 2군단의 피해


6사단의 사상자는 공식적으로 407명으며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는 춘천을 빼앗기고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인민군 출신 귀순자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 제2군단 사망자는 2,000명이었다고 하고 다수의 자주포가 격파되었으며 국군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전략은 무산되었다 이러한 피해의 책임을 지고 인민군 2군단 군단장 김광협과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전우가 해임되었다고 한다



남한측 입장에서 본 춘천-홍천 전투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인민군은 이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지 못하여 결국 최초 작전 계획에 크나큰 차질을 빚게 되었는데 인민군 2사단은 국군 6사단의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여 서울 동남방 진출이 막혀버렸고 이로 인해서 춘천에서 약3일 정도 남진을 지연당하게 된다 국군 6사단이 저항했던 3일은 한국전쟁에 엄청난 변수로 작용을 하는데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동안 한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지체함으로써 남한의 국군은 낙동방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군을 재편, 미군과 UN연합군의 한반도 진입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전투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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