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를 만든 한민족의 철천지 원수 8인
경술국적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에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병합 조약 체결에 찬성한 민족반역자 친일파 이완용 내각의 8명을 뜻한다고 합니다. 8명 모두 한일합방의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제국으로부터 귀족의 작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전원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
(내각총리대신)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3관왕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친일파의 끝판왕입니다. 1910년 8월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일본 제국의 각본대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한일병합 관한 건을 상정하였는데요. 이완용은 어전회의에서 황제의 면전에서 한일합병안을 통과시켰으며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하였다고 합니다. 경술국치(한일병합)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직접 문안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1919년 1월 15일에 고종황제가 사망하자 독살설이 퍼졌고 고종 양위를 강요했던 친일파들, 특히 이완용이 그 배후로 지목됐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한민족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악질 친일파이며 한민족들 사이에서 친일파하면 이완용으로 연계되는 인물입니다.
윤덕영
(시종원경)
윤덕영은 조선의 27대 국왕인 순종의 계후 순정황후의 큰 아버지이며 의정부의정대신 윤용선의 손자라고 합니다. 1919년 1월 15일에는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당시 소문으로 떠돌았던 고종 독살설에서 윤덕영은 고종을 독살한 인물로 의심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윤덕영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에서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국새를 빼앗는 방법에 가담하여 일본제국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윤덕영이 한일 합방을 강제로 체결하자고 하자 윤덕영의 조카딸인 순정황후는 자신의 치마 속에 옥새를 숨겨놓았는데 윤덕영이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하였다고 합니다. 윤덕영은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친일파 708인,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친일인명사전에는 윤덕영의 부인과 윤덕영을 대신하여 작위를 받은 양손자 윤강로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민병석
(궁내부대신)
민병석은 명성황후의 지원 아래 집권한 여흥 민씨 가문의 일원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고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위기상황에서 명성황후를 호위하여 총애를 받은 인물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완용과는 사돈지간이며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민병석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참가했던 경술국적의 한명으로 일본 제국으로부터 자작의 지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1911년에는 의민태자(영친왕)와 이방자의 정략결혼에 깊이 개입한 인물로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명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민병석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영희
(탁지부대신)
고영희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을 방문하였고 일본의 문물을 접하면서 친일 개화파에 속하게 된 인물이라고 합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일시적으로 관직에서 떠났고 다시 복귀하여 관직을 지냈다고 합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 대신으로 중용되었으며 1909년 내부대신 임시서리, 탁지부대신이 되어 한일신협약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고 합니다. 고영희는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포함되어있으며 친일파 708인과 친일반민족행위자 106인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박제순
(외부대신)
박제순은 1893년에 민씨 정권의 뜻에 따라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교섭을 하였고 충청도로 확산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박제순은 을사오적 중 한사람이며 경술국치의 한사람으로 민족반역자 2관왕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박제순이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던 중 일본 제국의 압박에 못이겨 고민하다가 일본 공사 하야시와 을사 보호 조약을 체결하면서 민족반역자로 낙인이 찍혀버렸다고 합니다. 을사 보호 조약 체결 이후에는 을사 보호 조약에 서명한 일로 노상에서 여러 번 피습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1909년 이완용이 고종 양위 사건으로 노상에서 저격당하고 입원하자 임시내각총리대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박제순은 결국 1910년 8월 내부대신으로 한일 합병 조약에 서명했고 특히 을사오적 후손들 중 유일하게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가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조중응
(법부대신)
조중응은 일찍부터 해외에 관심을 가지며 개인적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등을 여행하고 귀국하여 북방남개론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북방남개론이란 북쪽은 막고 남쪽을 열어야 한다는 친일 성향의 외교론으로 이로 인해 반일적인 여흥 민씨 집권 세력에게 쫓겨나 호남에서 오랫세월 유배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조중응은 법부 형사국장으로 명성황후를 서둘러서 폐비 조치하는 등 사후처리에 가담한 사실이 들어나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으로 붕괴하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십여 년간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06년 이완용 내각에서 법부대신으로 중용되면서 한일 신협약과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하였다고 합니다. 조중응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부터 뼈 속까지 친일파였던 인물로 다만 이완용의 독보적인 친일행동으로 친일파의 왕으로 이름이 오르는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중응 역시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6인, 친일파 708인, 친일인명사전 등 이름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이병무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실질적으로 이병무와 함께 고종 황제를 퇴위하도록 협박한 인물로 군인 출신의 친일파입니다. 이병무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한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역임 했는데요. 1900년에는 일본으로 피신한 망명자와 연락을 한 혐의로 2년 동안 구금되고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1907년 이완용 내각의 군부대신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의병 항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의병 탄압을 지휘했다고 하는데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에는 시종무관장으로 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자작에 봉해졌으며 친일파 708인,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조민희
(승녕부총관)
조민희는 경술국적 중 한 사람이며 민족반역자의 왕인 이완용에게는 처남이 된다고 합니다. 한일 병합 조약 당시 고종황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승녕부총관을 맡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조민희는 1910년 한일합방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제국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재산 관리를 잘 하지못해서 빚에 쫓기다가 파산하였고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자 195인 명단에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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