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무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5가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주력선이었던 판옥선을 이용한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일본 수군의 함선을 침몰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화포 사거리가 그렇게 길지 않았으며 함포 사거리가 5km를 넘는 시대는 19세기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하던 화포의 사거리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솔선수범과 공정한 신상필벌을 바탕으로 한 부하들의 신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지휘관의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 전라좌도 수군에 편제 되어 있는 병졸들의 가족관계 및 생활 등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병사들간의 의견 마찰로 일방적인 불이익을 얻은 병졸들에게 있어 중립적인 입장으로 해결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병사들과 지휘관의 신뢰를 통하여 명량해전 출정식과 같은 이순신 장군의 발언에 있어서 조선 수군 병사들의 사기가 상당치 작용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규정에 철저한 엄격한 군율
임진왜란의 경우 국가 전시 상황이라는 것을 작용하여 보았을 때 이순신 장군의 군법에 의한 균율은 목숨과도 같은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정규군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고 있던 전라좌수군은 내부적으로 군율이 철저하게 지켜졌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 수군 병사들은 일본 수군보다 지휘관이었던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전라좌수영에서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다는 기록도 나왔다고 하는데요.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완벽주의자였다기 보다도 임진왜란 당시 특수상황에 마춰 엄격한 군율로 군을 지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실전을 가장한 철저한 해상훈련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 인근 해상 지역 출신이 아니였으며 지역 백성들과 군관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광양현감 어영담은 남해안 일대의 해상 지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시피 광양현감 어영담은 이순신의 측근으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관 이후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 휘하 장군들을 포함한 광양현감 어영담의 도움을 많이 받아 훈련 자체를 실전처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수군과 전투에 대한 정보수집과 정찰을 중시
이순신 장군은 정보수집과 정찰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시 했다고 난중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전라좌수영에 입수되는 정보들의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첩자를 포함하여 많은 조선 백성들에게 정보를 수집했다고 합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 수군 등 일본군의 형태를 정찰하여 파악하였으며 이러한 정보전을 통하여 조선 수군의 출정을 결정하지 않았나 합니다.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한 근대적 함대전 사상
조선 수군이 이순신이 엄격한 군법 통제에 있어서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하여 전투를 벌 일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인 판옥선 보다도 가볍고 빠른 일본 왜군의 함선의 기동을 방해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는 점은 이순신의 전술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을 유인할 때 까지의 계략과 기동능력 및 타이밍, 통솔능력을 보았을 때 근대적인 해상전투 전술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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