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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상 한양을 점령 당했던 대규모 반란

똥베이런 2018.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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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이후 조선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은 대체적으로 왕족들에 의해 발생한 반란으로 왕족이 아닌 타인에 의해 일어난 반란은 많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한양을 점령 당했던 적이 한 차례 있었다고 하는데요. 조선 역사 상 한양을 점령 당했던 대규모 반란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조선 역사 상 한양을 점령했던 대규모 반란은 광해군이 폐위를 당한 '인조반정' 이후로 이를 후대에 이르러 이괄이 일으켰다해서 '이괄의 난'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괄의 난'을 먼저 살펴보려면 '인조반정'이라는 사건에 대해 알아야 된다고 하는데요. 

 


'이괄'은 '인조반정' 당시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했었지만 2등 공신에 임명되어 불만이 많았고 인조가 왕위에 즉위한 후에는 서인들에 의해 북방으로 좌천되었다고 합니다. 북방으로 좌천 된 후에는 1등공신들마저 목숨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조선 조정에서는 정치적 암투가 상당했는데 때 마침 이괄의 아들이 반역 스캔들에 휩싸여 한양으로 압송 될 처지에 놓였다고 합니다. 



조선의 중기의 법은 반역에 대해 매우 엄격해 이괄도 아들로 인해 목숨이 매우 위태로웠다고 합니다. 이괄이 지휘하던 관서의 병사들은 당시 인조도 두려워했던 병력들로 반역의 주모자로 거론 되 인물들 중 '이괄', '정충신'은 체포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괄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이괄의 아들은 체포되어 아들은 압송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이괄'은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라며 물으며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살해해버렸다고 합니다.



살해 이후 '이괄'은 자신이 지휘하던 관서의 병력과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요.



'이괄'을 따라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병력은 관군 3만 명과 정충신, 남이흥의 별동대 2만 그리고 항왜 3백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략 이정도의 병력만 합쳐도 5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대규모 군세로 인해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는 그렇다 할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고 승승장구하며 한양으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한양으로 진격한 '이괄 군'은 빠른 속도로 임진강을 건넜고 인조는 '이괄 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공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인조 피신 이후 '이괄 군'은 한양을 점령했고 한양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양 점령 이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반란 토벌을 임명받은 정충신 장군은 한양을 내려다볼 수 있는 무악재(안령)을 점령했는데요. '이괄'은 정충신이 무악재(안령)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안령을 점령한 병력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전멸시키겠지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령(무악재)에서 관군의 지독한 농성으로 인해 '이괄군'은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전투 진행 중에 돌풍에 의해 먼지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한명련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악상황 중에 갑자기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라는 부장이 탄환에 맞아 죽게 되었는데요. 관군측에서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이괄의 깃발이 쓰러지고 한명련이 죽었다!, 이괄이 도망친다!!라며 이괄군을 와해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이괄군은 안령 전투에서 대패한 후 서대문으로 입성하려고 했지만 당시 전투를 구경하던 백성들이 이괄군이 패배하자 서대문 성문의 문을 걸어잠궈버렸다고 하는데요. 이괄군은 서대문에 들어가지 못해 한양 인근으로 돌아 한양으로 입성했지만 지킬 병력이 없어 한양에서 전부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



이괄군은 한양 철수 이후 경기도 광주에 주둔하고 있다가 이괄의 부하장수였던 기익헌, 이수백에게 배신당하면서 한명련과 이괄은 목숨을 잃게되었는데요. 한명련과 이괄이 사망하자 군은 자연스레 해체 되었고 반란은 끝이 났다고 합니다. 이괄의 난은 반란으로 기록된 역사지만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해서 알고 있어도 나쁘지 않은 역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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