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위화도 회군4 이성계가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 2가지 여말선초(고려 말, 조선 초) 당시 고려 우왕의 장인이었던 '최영 장군'은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최영 장군'의 의도와는 달리 위화도에서 병력을 회군시켰는데요. 이성계가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 2가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군의 혼란과 전멸가능성 조선의 건국사를 보면 이성계가 요동을 건너기 전 고려군은 '위화도'에 주둔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려사절요에 기록 된 내용에 의하면 '제2차 요동정벌'에 동원 된 고려군은 고려 전역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은 죄다 끌어 모았던 병력들이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위화도로 지명되어 있는 현재 '함경북도 의주'군은 현재도 장마철이 되면 비가 심하게 올 뿐만 아니라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밀리터리 2018. 2. 12. 더보기 ›› 한민족 역사 상 가장 임팩트가 강한 사건 한민족 역사 상 가장 임팩트가 가장 사건은 조선 왕조가 탄생하게 된 계기인 '위화도 회군'입니다. '위화도 회군'이 한민족 역사 상 가장 임팩트가 강한 사건이라는 부분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1388년 5월 22일부터 6월 3일까지 벌어진 회군으로 당시 고려군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개경으로 회군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회군 루트에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예상강 등을 도하했음에도 원정군은 400km를 10일 만에 행군하는 괴력을 보여주었는데요. 또한 이러한 고된 행군에도 불구하고 회군을 감행하여 개경에 도착한 원정군은 개경을 점령하고 궁궐에 입성하여 회군을 마무리지었습니다. 또한 '위화도 회군'이후 이성계는 실질적인 고려의 실권자로 등극하면서 4년 간 허수아비 왕들을 앉혔다 .. 밀리터리 2017. 11. 14. 더보기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전설적인 무장으로 기록된 이유 태조 이성계는 여말선초 당시 고려의 무장으로 당대 최강의 무장으로 손꼽히는 무장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전설적인 무장으로 기록 된 이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여말선초 당시 동북면을 근거지로 하는 신흥세력으로 고려 말기 고려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고려사에는 이성계가 고려 말기 여진족, 원나라 군벌 등 오랑캐들을 모두 박살내면서 오랑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이성계는 최영 장군이 주도 한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을 함락하고 실권자로 군림했는데요. 하지만 이성계는 신진사대부 세력의 지지를 얻어 명분을 쌓아 자신이 직접 조선을 건국하고 왕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고려사의 기록.. 밀리터리 2017. 11. 2. 더보기 ›› '위화도 회군'이 쿠데타로 기록되지 않은 이유 '위화도 회군'은 여말선초 당시 고려의 요동정벌군이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했기 때문에 '위화도 회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려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원인인 '위화도 회군'은 쿠데타지만 쿠데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데요. '위화도 회군'이 쿠데타로 기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위화도 회군' 당시 요동정벌군은 엄청난 속도로 개경으로 회군하여 개경을 함락시켰습니다. 또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최고집권자로 우왕을 폐위시키고 허수아비 왕을 세우며 조민수, 정몽주와 같은 세력들을 견제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성계는 조민수, 정몽주의 도전에 그들을 물리치고 신진사대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는데요. 신진사대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직접 왕.. 밀리터리 2017. 10. 24. 더보기 ›› 반응형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