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권율14 일본인들의 시각에서 평가한 임진왜란 3대 전투 일본서기와 태합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처절하게 싸운 전투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처절하게 싸운 전투를 일본의 임진왜란 3대 전투라고 평가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일본인들이 평가한 임진왜란 3대 전투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치 전투 임진왜란 초기에 일어난 전투로 지휘관은 당시 광주목사 권율로 알려져 있는 전투입니다. 이치 전투에 참전한 왜군의 지휘관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라고 하는데요. 임진왜란 초기 순식 간에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식량 문제와 점령하지 못한 호남지역으로 진군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왜군은 호남으로 들어가는 전라도 진산군 인근 이치 지역에서 조선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전투 도중 호남의 대규모 의병 대군이.. 밀리터리 2018. 3. 19. 더보기 ›› 한국인이 임진왜란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5가지 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명나라) 정벌을 목적으로 벌인 전쟁입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 임진년에 왜군이 벌인 난리라고 하여 임진왜란이라고 통칭한다고 합니다. 연합국가 형식의 일본 임진왜란 당시 일본 열도의 경우 조선, 명나라와 같은 중앙정부의 집권 방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이 연합한 연합 성격이 상당히 강한 정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세력이 막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조선을 침공했던 왜군의 군사력은 통합체제로 동원이 가능 한 것이 아니었는데요. 일본 열도의 영주들 중 사이에서도 힘이 제일 막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에 임진왜란은 바로 종결되었다는 점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즉, 당시 일본은 중앙정부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 .. 밀리터리 2018. 3. 1. 더보기 ›› 임진왜란 당시 '권율'은 왜 파면당한 이순신을 보호해야만 했을까? 조선왕조실록과 난중일기 그리고 류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은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에 의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서 파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은 왜 파면당한 이순신을 보호해야만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조정의 명령을 거부한 이순신은 선조에 의해 파면당해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면당하자 류성룡의 반대 정치세력들은 이순신 장군을 처형시켜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권율 장군이 정치적 입지를 발휘하여 자신의 휘하에서 농사를 지으며 몸을 추스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또한 권율은 이순신이 백의종군 한 뒤에도 자주 이순신을 찾아가 전투 및 전략 그리고 지휘체계에 .. 밀리터리 2018. 2. 9. 더보기 ›› 민족을 구한 권율과 이순신이라는 2명의 영웅을 만든 인물 1592년에는 한민족 최악의 위기였던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는 7년 동안 지속된 전쟁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 정규군은 허수아비 군대로만 역사에 남았을텐데요. 민족을 구한 권율, 이순신이라는 2명의 영웅을 만든 인물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이후 '광주목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임진왜란 발발 초기 이치에서 호남으로 진격하는 왜적을 막아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호남 진격을 막아낸 바 있습니다. 또한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서 3만의 왜군을 물리치면서 '도원수'라는 직책에 임명되어 조선 육군을 총지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 전라남도 수군 지휘를 담당하던 '전라좌수사'의 직책에 임명되어 사천해전, 한산도 대첩을 승리.. 밀리터리 2018. 1. 25. 더보기 ›› 뛰어난 지휘관에 의해 승리한 한국사 7대 전투 한국의 역사를 한국사로 부르고 있으며 한국사에는 뛰어난 전략과 지휘 능력으로 열세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 낸 지휘관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지휘로 인해 한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한국사 7대 전투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살수대첩 살수대첩은 수나라-고구려 전쟁을 대표하는 대첩으로 살수대첩의 지휘관은 고구려의 재상 을지문덕 장군입니다. 수나라의 정사서인 수서에 의하면 살수대첩 당시 수나라 별동군 305,000명 중 수나라로 돌아간 병력이 2,7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살수대첩 당시 동원 된 고구려 병력과 피해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살수대첩의 승리는 중국의 왕조국가 수나라가 멸망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된 전투라고 합니다. 명량대첩 명량대첩은 전 세계 해전사에서 미스테리로 이론상.. 밀리터리 2017. 12. 16. 더보기 ›› 반응형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