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대한광복군 출신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똥베이런 2017.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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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덕 전 공군참모총장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국방차관을 지냈다고 합니다. 최용덕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 2대 참모총장을 지냈다고 하는데요. 최종 계급은 중장으로 예편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공군 2대 참모총장 최용덕 장군

(1898년 9월 19일 ~ 1969년 8월 15일)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최용덕 장군은 일제강점기 시절 중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였고 졸업 이후에는 김원봉의 의열단의 항일 활동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특히 최용덕 장군은 중국의 손정방 군벌 항공대의 조종사로써 활동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손정방의 군벌 항공대가 국민군 항공대에 흡수되면서 중국공군학교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최용덕 장군은 국민군 공군지휘부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공군기지학교교장직을 수행했다고 하는데요.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 항공건설 위원회 주임의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특히 1940년대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에도 참여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총무처장, 사령관 등을 지내며 일제 해방 전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최용덕 장군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귀국하여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항공건설협회 회장을 지냈다고 하는데요. 최용덕 장군은 여성 최초 조종사인 권기옥을 포함하여 장덕창, 박범진,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등의 국민 항공군 출신의 조종사들과 항공대를 추진하지만 미군정이 그들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용덕 장군은 조선 미군정의 조건인 미국식 군사훈련을 수료하기 위해 입교하여 보병교육을 받고 1948년 4월에 소위로 임관했다고 하는데요. 이 때 최용덕 장군의 나이가 만 49세 였다고 합니다.



미국식 군사훈련을 이수한 최용덕 장군은 다행히도 미군정으로부터 국민군 항공대 경력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을 하게 되는데 1948년 7월 9일에는 백인엽 소령의 후임으로 육군 항공기지부대 2대 사령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1948년에는 미군정이 철수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방차관을 지냈다고 하는데요. 대한민국 공군이 1949년에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자 최용덕 장군은 공군사관학교장,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을 지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50세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제3대 공군학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하여 김포기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는데 일조했다고 합니다. 



최용덕 장군은 1952년 12월 1일까지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여 한국전쟁 휴전이 될 때가지 대한민국 공군의 항공작전을 총괄했다고 합니다. 특히 최용덕 장군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항공기를 꿈꾸었다고 하는데요. 비행기 제작 기술은 미래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일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후 1952년에는 2대 공군참모장에 올랐으며 1955년에 퇴임 후 중화권의 인연으로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다고 하는데요. 현재 대한민국 공군이 세계 10위권의 강군으로 성장하기까지 대한 광복군 출신, 대한민국 공군 1세대 최용덕 장군의 의지와 결의가 매우 지대한 역활을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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