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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킨 위대한 수군지휘관 10인

똥베이런 2017.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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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592년 왜군이 침범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순식간에 도성 한양까지 함락 당하며 국왕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바다를 지킨 수군지휘관들이 있었는데요.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따르는 전라좌수영의 장수들이었습니다. 조선의 무적함대 전라좌수영을 지휘하는 수군지휘관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킨 위대한 수군지휘관 10인



이순신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 현대에 들어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는 명장 중에 명장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와 전라좌수사를 겸임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이순신 장군의 함대와 해전을 벌이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권준 (순천부사)


순천부사 권준은 충무공 이순신의 오른팔격으로 평가받고 있는 전라좌수영의 장수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영 소속으로 옥포, 사천, 한산, 부산포 해전에 참전하여 조선 수군이 연승을 하는데 있어 큰 기여를 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평가하고 있는데요. 순천부사 권준은 경상우수사 원균에 이어 경상우수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받자 경상우수사를 사직했다고 하는데요. 임진왜란 이후에는 관직을 지내다가 1611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무의공 이순신 (방답첨사)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조선왕족출신의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지휘관입니다. 대체적으로 현대인들은 무의공 이순신, 입부 이순신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무의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치룬 굵직한 해전인 옥포해전, 합포해전, 노량해전, 사천해전 등의 해전에서 활약했다고 합니다.



신호 (낙안군수)


낙안군수 신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조선의 북방에서 근무하던 무관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 직전에 낙안군수로 임명받았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견내량, 안골포 등지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와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낙안군수 신호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남원성 포위를 풀기 위해 남원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대용 (훈련원봉사)


나대용 장군은 조선 전라좌수영 소속의 무관으로 거북선의 건조와 병기류 제조에 기여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나대용 장군은 비교적 속도가 느린 판옥선을 개량한 전공을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에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나대용은 당대 최고의 선박기술자라는 평가와 더불어 당대 조선 수군의 핵심 기술자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나대용 장군은 경기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에 임명되었으나 1611년에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재발하여 사망했다고 합니다.



정운 (녹도만호)


녹도만호 정운은 전라좌수영 내부에서도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특히 녹도만호 정운은 옥포, 당포, 한산도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공을 세운 인물이라고 하는데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전승무패의 부담을 가지고 있는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주문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녹도만호 정운은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요.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자 충무공 이순신은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사명당 김완 (사도첨사)


사명당 김완은 전라좌수영 소속의 무신으로 조선 수군의 주요 해전에 참전하여 조선 수군이 연승을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전라좌수영의 장수들이 사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을 보좌했던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명당 김완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었지만 탈출하여 귀국했다고 하는데요. 사명당 김완은 1607년에 고향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어영담 (광양현감)


광양현감 어영담은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물길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한 조선 전라좌수영의 핵심 지휘관입니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제2차 당항포 해전까지 조선 수군의 대승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파직 당할시에도 백성들이 구명운동을 펼쳐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에는 "96년 4월 초 9일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비가 쏟아졌다. 어 조방장(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다 말하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만큼 충무공 이순신에게 핵심 인물로 인정받았던 인물입니다.



송희립 (다대포첨사)


조선 전라좌수영의 핵심 참모로써 이순신 장군의 직속군관 송희립 장군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 조선 전라좌수군의 해상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송희립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관직에 복귀하자 칠천량 해전에서 전투기능을 상실한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데 있어 힘을 쏟았다고 하는데요. 광해군이 집권하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고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잃은 그 해에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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