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한국전쟁 전개 과정 정리

똥베이런 2016.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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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국전쟁에 대한 전개 과정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부분도 있을 수도 있고 제가 잘못알고 있는 부분도 있으니 욕설과 비판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1. 북한의 기습남침

개전 당시 남북한 병력 현황 (단위 : 명)

 국군

인민군 

부대명 

병력 

부대명 

병력 

1사단 

9.715

1사단 

11,000 

2사단 

7,910 

2사단 

10,838 

3사단 

7,059 

3사단 

11,000 

4사단 

11,000 

5사단 

7,276

5사단 

11,000 

6사단 

9,112

6사단 

11,000

7사단 

9,698

7사단 

12,000 

8사단

6,866 

 -

수도경비사령부

7,061 

10사단 

6,000 

-

13사단

6,000 

15사단

11,000 

766독립보병연대

3,000

12모터사이클연대

2,000 

-

105 기갑여단

6,000 

-

경비 1여단

5,000

-

경비 2여단

2,000

-

경비 3여단

4,000

-

경비 5여단

3,000

-

경비 7여단

4,000

-

 1,2군 사령부

5,000



1950년 6월 25일, 장마철과 겹쳐서 군대의 진군에는 적절치 않은 시기인 초여름에 개전한 이유에 대해 많은 주장이 있는데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통일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38도선에서 최종목표 부산까지 500km라 가정하고 소련군 고문관의 계산에 의해 하루 10km씩 진격할 것을 가정하면 50일 정도가 소요된다는 이야기인데 8월 15일에서 50일을 역산하면 6월 25일이므로 이 날을 개전일로 택일하여 북한군이 선제 공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2. 국군의 초기대처


북한군이 공격을 감행하자 국군 전방지휘관들은 모두 바보가 아니었기에 북쪽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첩보에 따라 24일 저녁에 전방사단에서 몇 개 팀의 정찰조들이 38도선을 넘어 정찰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정찰조 중 한 팀이 대규모의 전차들이 남진하는 것을 목격했으나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려고 했으나 당시 최첨단 통신장비였던 미제 SCR-300 무전기가 맛탱이가 가버려서 보고를 하지 못했고 정찰대원들은 결국 적 후방에 남겨지면서 일부는 실종, 일부는 인민군을 털어서 변복을 하여 겨우 퇴각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서울 북방 방어선이 뚤리면서 인민군은 서울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쟁 3일만에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함락되면서 전쟁이 조기에 북한군의 승리로 종결 될 가능성이 보였으나 미국이 개전 2틀 만에 UN군 파병을 결정하면서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



3.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몽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정체를 숨긴 채 6월 27일 새벽 2시에 특별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으며 이 몽진의 혼란상을 살펴보면 실로 가관이었던 점은 입법부와 사법부와 부통령도 대통령의 몽진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국무회의의 각료들마저도 이 사실을 6월 27일 아침에 알았으며 국회는 전선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6월 27일 새벽 4시에 서울 사수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했는데 이미지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전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신익희와 조봉암은 부랴부랴 피난에 나섰고 같은 날인 27일에는 생방송에서 "동포 여러분, 계속 진격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라는 방송을 내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군인 28일 0시에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까지 남하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6월 28일 새벽 2시에는 방송이 시작 된지 5시간 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 한편 이승만은 6월 27일 수원의 미군 맥아더 사령부 전방지휘소가 오산으로 철수를 결정하자 이승만은 7월 1일에 대전에서 부산으로 다시 피난을 가기로 한다. 결국 목포에서 해군 함정을 타고 19시간 만인 7월 2일 오전 11시경 부산항에 도착했다고 한다.



4. 북한군의 지체와 서울 함락


한국전쟁 당시 이시영 부통령은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결심했으나 결국 지인의 설득으로 수원으로 뒤늦게 피난가게 되는데 서둘러 피난가지 않았다면 납북되었을 기세였고 만약 이시영 부통령이 납북되었다면 당시 부통령도 나름대로의 헌법 기관이었던 만큼 악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월북하거나 납북당한 제헌의원이 상당하다고 한다. 정확하게 북한군이 지체한 이유에 대해서는 확답을 하기는 어렵지만 동부전선의 영향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북한군이 처음에 계획했던 대한민국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해군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에 남, 북한 해군 모두 질, 양적 수준이 빈약해서 함대 간의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고 1960년 대에 들어서 연구한 결과 해군도 활약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PC-701 백두산함이 후방침투를 막았기 때문인데 대한해협 해전에서의 승리는 육, 해, 공군 통틀어서 국군 최초의 승전이었다.



5. 국군의 지연작전과 미군


낙동강 방어전선과 인천상륙작전에 비해서 주목도가 정말로 낮은 것이 바로 국군의 지연작전인데 국군의 지연작전은 대한민국이 적화통일되지 않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당시 국군은 5개 사단이 모두 와해된 상황에서 부족한 무기를 가지고 무려 3개월을 버텨냈는데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데 3일이 걸렸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분전이었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판단한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특무부대를 투입했다.



6. 스미스 대대의 투입


1950년 7월 5일 경 북한군은 UN군과의 첫 교전을 하였는데 이 때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배치되었고 찰스 스미스 중령은 1916년 생으로 이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34살의 청년이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찰스 스미스는 자신의 대대가 궤멸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참전했으며 2004년에 88살을 일기로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작고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찰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스미스 중령 이하 총원 406명으로 2개 중대로 이루어진 1개 보병 대대와 52야포대대 A포대 13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미스 대대는 7월 1일 오전 8시 45분에 이타즈케 공군기지를 출발하여 수원 비행장으로 도착할 예정이었고 A포대는 배로 부산까지 이동 한 뒤 철도를 이용하요 수원에서 보병대대와 합류하여 한국군과 함께 한강에서 지연작전을 펼칠 계획이었으나 6월 30일 수원에서 미군 정찰기가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해 수원으로 북한군이 들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오보를 들은 연합군은 수원 비행장을 포기했고 뒤늦게 오보라는 것을 알았지만 비행장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7월 5일에는 북한군이 야포부대와 화기소대를 앞세워 화력공격을 하자 스미스 대대는 150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전사자 중에는 부대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7. 낙동강 전선


한국전쟁 당시 남한은 제대로 전쟁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낙동강 전선에 대한 의미는 상당하다고 보고있다. 당시 남한 정부는 서울을 대신하는 임시수도로 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고 더글라스 맥아더 UN군 사령관은 임시수도 부산에 미8군 사령부를 일본에 UN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당시 인민군은 북한출신 5만명과 남한에서 모은 의용군 5만명을 더하여 10만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는데 그에 반해 UN군은 20만명으로 병력이나 화기면에서 압도적이었다. 특히 공군과 해군의 전력은 일방적으로 UN군이 우세했기 때문에 동해안 지방에서는 미군 전함에서 막강한 함포 사격으로 북한군 방어진을 달표면 처럼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국군과 UN연합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전개했고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지만 대구, 칠곡, 영천 등지를 두고 벌어진 다부동 전투와 왜관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8. 인천상륙작전, 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


인천상륙작전 이후 경상도지역에서 북진이 시작되었는데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였고 10월 1일에는 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다. 이 것이 국군의 날의 기원이 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감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연관성은 낮은 편이라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모루가 있는 상태에서 망치의 전형적인 우회기동이었던 반면 노르망디의 경우에는 모루가 없는 상태에서의 직접적인 상륙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에는 육군 17연대와 해병대 1연대가 참여하였고 인천지역에서 작전한 한국 군인은 유진 클라크와 함께 팔미도의 버려진 등대를 점거한 해군 장교 연정, 육군 장교 계인주 등이라고 한다. UN군의 본래 참전 목적이 방어였던 만큼 38도선을 넘는데 있어 UN연합의 결의가 필요했으며 이 맘때 쯤에는 북한과 중국이 접촉하였고 UN측에서는 대수롭게 않게 여기면서 국군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UN군 또한 39도선을 넘었다. UN군은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하였으며 11월 말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9. 중국군의 참전


1950년 10월 중순 이후부터 이미 중국인민지원군이 한반도에 진입하고 있었으며 UN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을 때 이른바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국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참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맥아더의 오판으로 들어났지만 인해전술이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은 당시 참전한 중국군은 저평가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제로 중국인민지원군은 당시 중화인민해방군에서도 핵심부대로 이루어진 정예부대였다는 점이다. 중국군 총지휘관이었던 펑더화이가 미군과 한국군의 약점을 간파한 뒤 이를 적극 공략한 것도 고려해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에는 10월 공세가 틀어졌고 11월 공세에서는 미군 1개 사단이 거의 전멸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한국군 사단들 대부분이 편제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재 점령당했다고 한다. 중국군도 물론 피해가 크긴 했지만 미군을 상대로 벌였던 이 전투들로 인하여 중국군은 세계에 위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10. 휴전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 이후 양측 모두 더 이상의 공세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비록 선전했지만 중국군은 근본적으로 보병위주의 편제였으며 보급 수준도 낮아 기간을 정해두고 그 기한내에서만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잘 준비된 DMZ의 미군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1951년 6월 경에는 소련의 제의로 휴전협정이 시작되었으며 2년간 협상을 후지부지 끄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국지전은 오히려 더 활발해졌었다고 한다. 휴전이 2년동안 지속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21세기에 비밀 해체된 구 소련의 문서에서 밝혀졌는데 이유는 스탈린의 고의적인 지시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이 미군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미국이 서유럽에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교착상태의 한반도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묶어놓고 싶어했다. 결국 스탈린이 1953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나서 휴전협상이 급물살을 타면서 비로소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위키백과,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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