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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레전드 지휘관 3인

똥베이런 2016.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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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이란 뛰어난 지휘관을 뜻하는 말로 국가에 큰 공을 세우거나 특유의 지휘능력으로 국가를 구하거나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사람들 대체적으로 명장이라고 일컫는다. 한국전쟁 당시 유명한 지휘관들은 많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친일행동을 했던 사람들도 존재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일본군에서 군복무를 하였기 때문에 친일행적이 있는 인물들은 제외하였으니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레전드 지휘관 3인



김홍일 장군

(1898년 9월 23일 ~ 1980년 8월 8일)


중일전쟁 당시 중국 국민당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중국 국민당 소속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도 하였고 해방 이후 남한으로 들어왔으며 1948년 12월 10일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대한민국군 육군 중장으로 임관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계속 밀리자 국방부 자체 군원로회의에서 한강 이남방어선 구축을 주장했으나 거부당했고 이후 후방에서 근무하다가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구원투수로 등장 당시 백선엽 장군의 <군과 나>에 의하면 김홍일 장군은 부하에게 말끔하게 장군복을 다려오라고 지시한 다음 위엄한 모습으로 서서 흩어져 도망가는 국군 병력들을 불러 세웠다고 한다. 우왕좌왕하던 국군 병사들에게 신뢰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다시 부대에 국군 병사들이 복귀하게 되었고 이렇게 모인 한국군 병사들로 한강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고 한다. 지연전을 펼치면서 7일 동안 한강 이남 방어선에서 7일이나 지키는 기적을 보여줬다



손원일 장군

(1909년 5월 5일 ~ 1980년 2월 15일)


손원일 장군은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손원일 장군의 부친인 손정도 목사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고 손원일 장군은 광복 이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1948년 12월 10일에 한국군 최초로 준장에 진급했으며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을 역임하다가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내며 해군을 건설하고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했다



한국전쟁 당시 손원일 장군은 해군 함정 인수를 위해 미국에 가 있었고 개전 소식이 들리자 서둘러서 귀국을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인수중인 함정을 이끌고 오도록 지시하여 전쟁이 어느정도 진행 된 뒤에야 한국에 귀국했다고 한다. UN연합군 인천상륙작전 당시 손원일 장군은 연합군의 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인천 영흥도와 덕적도의 탈환을 지시하여 인천상륙작전의 밑거름이 되게 하였고 상륙작전 당시에 함대 지휘권은 없었지만 직접 소총을 들고 한국 해병대의 상륙작전을 지휘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의 장성들도 손 제독이 직접 돌격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채명신 장군

(1926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5일)


채명신 장군은 월남전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인물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평양 인근에서 교사로 지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월남하였고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5기로 학교를 졸업하여 군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채명신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에 계급은 대위였다고 하며 채명신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던 부대인 백골병단 부대원들의 대부분이 북한출신 박공청년과 피란민들로 군대 경험을 가진 사람은 지휘관이었던 당시 채명신 대위 뿐이었다



백골병단은 한국전쟁 당시에 게릴라 형식으로 북한군 점령지를 돌며 후방교란을 펼쳐 굉장한 전과들을 다수 올렸다고 한다. 실제로 전차를 앞세우며 남하하는 대대급 규모의 북한군을 마추쳤을 때도 북한군 행세를 하며 무사히 지나치거나 북한군 행세를 하며 북한 장교들을 포로로 잡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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