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지켜준 월튼 워커 중장

똥베이런 201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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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차세계대전에서 기관총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으로 군생활을 시작했고 2차세계대전에서는 조지 S.패튼이 지휘하던 제3야전군 산하의 20군단장으로 참전했는데 빠른 기동성과 활약으로 월튼 워커가 지휘하는 부대의 별명이 '유령군단' 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다만 나이에 비해 진급이 늦었다는 평을 들었으나 한국전쟁에서 보듯이 비정치적이었고 기자들이나 외부인사들의 방문을 아주 싫어 했다고 한다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 ~ 1950년 12월 23일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2세대 영웅들의 아버지"


"맥아더와 더불어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



6.25 한국전쟁 참전


월튼 워커 중장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으로 행했고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 참전했는데 중장이라는 높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전선 최전방에서 맨 앞에 서서 부하들을 진두지휘했고 월튼 워커 중장의 늦둥이 외아들 샘 워커 대위 역시 한국전에 참전하여 활약한다



New Korea Plan (한국 망명정부 수립계획)


한국전쟁 초기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게 고전하자, 미국 본토에 있는 미국 정부는 한국의 정부요인 및 피난민을 합친 62만명의 인원을 배에 태워서 당시 뉴질랜드령이었던 서사모아 제도 내 어느 섬으로 이주 시킨 뒤 한국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계획이 있었다 이 계획은 미국 공식문서에서 New Korea Plan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미국정부가 미8군 사령관을 통해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영천 방어선이 붕괴되면 이승만 대통령과 서사모아로 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는 제안이 실제로 존재한다 


미국 본국과 UN군도 염두하고 있던 New Korea Plan


한국전쟁 초기 당시에 미국정부의 입장에서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버리면 남한의 전국민들 집단 이주를 보내야 하는건가 싶었던 그 당시에 미국정부는 한국전쟁 초기에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도 남한을 포기하는 것에 고려하고 있었는데 미국 본국에서 준비한 New korea Plan은 둘째치고라도 전면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으니 엄청난 기세로 모든 지역을 점령당한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았을때 남한은 승산이 전혀 없어 보였고 미국 본국에서도 철수 주장과 New korea Plan 계획을 만들고 있었지만 미국군 중 유일하게 월튼 워커 중장만 낙동강 방어선에서 무조건 버티겠다고 주장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사수해야 한다 무조건 방어해라


워커 중장은 맥아더에게 남한 사수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는데 맥아더는 당시 일본에 있었고 워커 중장은 한국에 있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던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장병들을 만나서 이렇게 전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그리고 나서 전설적인 월튼 워커의 명언은 다음과 같다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



월튼 워커의 결단과 낙동강 전선 방어


사실 월튼 워커 중장은 인상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아닌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하는게 마땅한가? 라던가 버티지 못하면 죽어라? 조국도 아니고 다른 전선에서 뭐하는짓인가? 와 같은 맹비난을 감수해야만 했고 그나마 맥아더 사령관이 월튼 워커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였다 실제로 월튼 워커 중장의 입장을 고려해보면 미국의회에서 맹비난을 받았는데 한국 장병들에게는 내가 죽더라도 한국을 꼭 지켜줄께 라고 발언했으니 책임감이 따랐을 것이다



이후 워커 중장은 낙동강 전선 중에서도 최전선 방어에 힘을 쏟아부었고 한국군과 미군 병사들이 모두 미숙한 훈련병들 위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방어하였고 타흐신 야즈즈 소장이 이끄는 터키군 1개사단 + 1개 여단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성공하면서 방어선을 굳혔다


낙동강 방어선 방어를 굳힌 후 맥아더 사령관이 낙동강 전선 시찰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찰 덕분에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 구상이 가능해졌고 워커 중장은 사령관을 도와서 인천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엄청난 공을 세웠다 실제로 월튼 워커 중장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시도도 못했을 것이다



월튼 워커 장군이 한국의 대위기를 막아주었지만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도중, 양주군 의정부읍으로 가는 서울시 외각의 어느도로에서 맞은편에서 한국군 탄약운반 삼륜차 트럭이 월튼 워커 중장이 타고 있던 지프차와 부딪치면서 즉사하였다 이승만은 사고를 일으킨 한국 사병을 포살하라고 했지만 워커 장군 가족들이 말린데다가 조사 끝에 과실이라는게 확인되면서 처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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