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살린 '이치 전투'
이치전투는 1592년 8월 14일에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고개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치 전투 당시 권율과 황진이 이끄는 1천 명의 조선 관군이 일본군 장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지휘하는 2천의 일본 왜군에 맞서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이치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의 최초 전라도 진격 작전을 방어한 전투입니다.
이치 전투의 배경
이치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에 치뤄진 전투로 단 기간에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이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 한 것에 대해 전쟁이 장기화 될 것을 우려하면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 수뇌부는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 일대를 점령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하였다고 하는데요.
호남 점령 판단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직계 휘하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명령하여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성을 점령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결국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경상남도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별군 2천명을 남원, 전투 또는 광주로 이동시켰습니다. 또한 의령에 있던 곽재우의 의병이 정암진에서 2천명의 일본군을 격파하자 이 소식을 들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한양에서 직접 전라도로 내려와 전라도 점령을 지휘하기로 합니다.
이치 전투의 시작과 일본군의 호남진격 방어
고바야카와는 1592년 6월 23일에 금산성을 함락시키고 금산성을 기준으로 일본 제6군 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2개의 대대로 나뉘어서 전주성으로 진격하는 길로 진군시켰는데요. 일본군 1대대는 웅치를 넘어서 전주로 들어가야했고 왜군 2대대는 이치를 넘어서 전주로 들어가야했다고 합니다.
이 정보를 수집한 조선군은 이치와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 할 예정이었고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전주성에 집결해서 2차 방어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치 전투는 1592년 7월 7일 일본 왜군 1대대가 웅치 골짜기를 둘러쌓아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전투 개전일 7일과 8일에 걸쳐 조선군의 1, 2차 방어선이 무너져버렸다고 합니다.
권율 역시 이치에 주둔한 병사들을 독려하며 전투에 임했는데 비겁한 병사가 눈에 보이면 군법에 의해 조치해갔다고 합니다. 결국 권율은 조선 관군의 군기를 바로 잡았고 웅치를 돌파한 왜군 제1대대는 전주성 앞까지 도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주성 인근에 도달한 일본군 1대대가 방향을 돌리더니 후퇴를 하기 시작했고 거의 동시에 이치에 있는 일본군들도 후퇴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본군이 후퇴한 이유는 고경명이 이끄는 전라도 광주, 장흥 지역의 7천 명의 의병군이 금산성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후퇴 이후 고경명의 전라도 의병조직은 금산성을 수 차례 공격했고 결국 일본 제6군은 경상도 성주 방면으로 퇴각하여 일본군의 호남진격을 방어하였다고 합니다.
이치 전투 방어로 인한 임진왜란의 경과
이치 전투 방어로 인하여 전라좌도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명나라의 대규모 군대 파견과 더불어서 조선 정규군을 호남을 중심으로 재편하여 반격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또한 군수물자 및 식량이 보급되지 않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호남을 무조건 점령해야 하는 지역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 본국의 토요토미 역시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전라도부터 점령하라고 지시를 한 바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치전투로 인하여 조선이 반격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준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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