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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을 숙청하라! 북한 8월종파사건

똥베이런 2016.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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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8월에 김일성이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정적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지금의 북한을 독재체제로 존속시킨 결정적인 사건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나라 주제에 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으며 민주주의도 아니고 인민을 위하지도 않을 뿐더러 공화국도 아니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정확하게는 김일성이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일으킨 숙청사건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한국전쟁 전 후의 북한정부의 권력구도


만주파(혹은 만주 빨치산파) : 김일성,김책,최용건 등으로 1930년 대에 만주에서 항일독립 운동을 하던 무장 빨치산 활동을 했던 그룹으로 1930년 말 일본군의 빨치산 토벌이 심해지자 소련령인 연해주로 피신하였는데 1940년에 김일성이 제일 먼저 넘어갔고 김책이 1943년에 가장 늦게 월경하였으며 이후 소련군 88국제여단에 편입되어 장교계급을 받고 소련식 군사훈련을 받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자 1945년 10월에 소련군을 따라서 북한에 들어갔고 이들은 독자적으로 활동한 적이 없으며 항상 중국공산당원들과 함께 움직였다는 것이다.


갑산파 : 1930년 ~ 1940년대 한반도 북부지방에서 활동했던 그룹이고 이들의 상당수가 함경도 갑산 출신이라 갑산파라고 칭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만주파와 연계하여 활동했고 해방 후에도 만주파와 함께 했기 때문에 만주파의 일부로 보고 있으며 1967년에 경제건설 노선에서 반대의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연안파(혹은 중공파) : 김두봉,무정처럼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 참여하면서 중국 본토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그룹이며 이들의 상당수는 1930년대 말부터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있었다. 하지만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다 이 때문에 중국 국공내전기 중국 공산당의 수도였던 연안의 이름을 따서 연안파라고 부른다.


소련파(혹은 소련 유학파) : 북창옥,허가이,이상조,남일 등 소련출신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주로 중앙아시아와 연해주의 고려인 2,3세들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말이 통하는 소련 공산당원을 찾다보니 북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남로당파(혹은 국내파) : 박헌영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에 국내에서 항일운동 및 공산당 활동을 했던 그룹으로 이들은 일제패망이후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정예당원 10만 , 방계조직 100만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면서 1945년 9월에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를 주도하였으며 일제 패망이후 남한에 미군정의 통치자 굳건해지자 무장봉기 등 강경노선을 채택하다가 실패하게 되었으며 남한에서 남조선로동당이 불법화되자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와 정예당원 수천명이 집단 월북하였다.


사건 진행과정



1. 무정과 박헌영의 숙청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도부의 기대와는 달리 초반에 잠깐 승승장구하다가 미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서 오히려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중공군의 참전과 소련의 지원으로 간신히 패전 위기에 벗어났는데 궁지에 몰린 김일성 정권을 실패한 대한 책임추궁으로 권력기반이 약화 될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실패의 책임을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박헌영과 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1951년에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김일성의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고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미제침략자들에 맞서서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권력을 계속 강화해 나갔다. 대표적으로 총참모장 남일이나 내무상 방학세 같은경우에는 소련파였으나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옛 동지인 소련파에게 총리를 돌렸다



2. 한국전쟁 이후 복구방향에 대한 의견 대립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UN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 있었고 북한의 중요도시인 평양과 원산을 비롯해서 각종 인프라 시설들이 폭격으로 인하여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은 종전 직후부터 사회주의화 되어 있는 국가들과 주로 중국의 원조를 받아서 복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복구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특히 산업발전에 방향을 두고 김일성과 반대파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파는 소련과 같은 중공업산업 위주의 복구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에 비해 소련파와 연안파는 당장 인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경공업 산업위주의 복구를 추진해야 함을 역설한다. 만주파가 중공업 중시정책을 제안한 것은 빠른 군비확장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소련이 위성국가들의 경공업 발전을 최대한 막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간에 경제정책에서 이러한 대립은 권력투쟁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3. 소련 공산당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 당시에는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추진되었고 스탈린은 신격화되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가 등장하면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였고 스탈린의 신격화는 중지된다 이후 소련의 지도부는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면서 자본주의 세력과의 관계개선을 꾀하게 되었고 막장식의 극단적인 권력투쟁의 형태는 많이 약화되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세력의 리더로 자의 반 타의 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위치에 있었고 소련 공산당의 변화는 반대파를 무자비 하게 숙청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가던 김일성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자 위기였으며 반대로 김일성의 숙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대파에게는 김일성을 비판하고 실각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4. 중국과 소련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막대한 물자와 군사력을 북한에 지원하였기 때문에 연안파를 통하여 북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게다가 1958년도까지는 전쟁 방지라는 명분 하에 중공군도 북한 내에 진주하고 있었다 또한 소련은 한국전쟁 당시 방관의 자세로 북한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부인 할 수 없는 세계 초강대국이자 공산주의 세력의 리더였다 즉,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내정간섭을 일정부분 피 할수가 없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일단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의 분열을 이용하면서 외교적 이득을 보았기 때문인데 북한전문가인 란코프 교수는 당시 소련은 북한에 대하여 이싱하고 웃긴나라 , 미친독재국가라는 인식이었다고 발언했다 그래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의 반대파인 박헌영과 최창익 그리고 김두봉 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소련과 중국은 여러차례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중국 또는 소련으로 보낼 것을 김일성에게 요구하였는데 김일성이 눈치를 보다가 박헌영을 제거해버렸다 그리고 나중에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중국과 상의도 없이 연안파를 대거 숙청한 것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8월 종파사건 사건내용


김일성의 반대파들이 많은 변화에 힘입어 1956년 4월에 예정이었던 조선로동당 3차대회에서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과 당 운영의 민주화가 논의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개인숭배 움직임과 관련해서 오히려 엉뚱한 발언을 해버리는데 개인숭배에 관련하여 박헌영의 책임으로 씌우면서 자아비판을 거부해버렸다 게다가 복구정책노선도 중공업위주로 추진되어버렸다 이러한 결과에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실망하고 반 김일성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김일성이 동유럽순방을 위해서 북한을 비운사이에 연안파와 소련파는 소련의 지지에 힘입어 연합하여 김일성 실각이라는 목표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전면에는 연안파가 나서게 되었으며 소련은 연안파 핵심인물들을 만나면서 반 김일성 운동을 부추겼으며 다만 소련이 전면에 나섰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 소련파가 전면에 나서게 하지는 않았고 연안파를 전면에 앞세워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반대파의 움직임은 최용건을 필두로 한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포착되어 즉시 김일성에게 알렸고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에 박정애와 남일을 파견하여 소련에게 더 이상 반대파들과 접촉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등 반대파의 움직임을 무마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다.



김일성의 승리 요인으로는 김일성 세력의 조직력이라고 보고 있는데 김일성 세력은 일제 만주 빨치산시절부터 김일성을 정점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에 권력 투쟁시에 다른 계파보다 비해 전투력이 강했다 김일성에 대한 반대파의 공개적인 도전은 1956년 8월 30일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는데 김일성은 연안파와 소련파 등 반대파의 움직임을 대비하고 있었고 그 중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를 비판해야 하는 핵심을 벗어나 김일성의 간부정책 비판으로 방향을 벗어나게 된다 이는 김일성 지지자들이 다수였던 전원회의 참석자들을 자극하였고 윤공흠은 이들에 의해 억지로 단상에 끌려내려오게 된 것이다. 중국으로 망명한 서휘는 윤공흠이 김일성의 간부들, 특히 당시 당 간부들의 신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비정치적 과오'였다고 생전의 회고에서 밝혔으며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체험한 윤공흠과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신의주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은 김일성 반대파들의 권력투쟁에서 패배를 뜻하는 것인데 오후에도 계속 되었던 회의에서 김일성 지지파 들은 강도 높게 비판했고 결국 서휘와 윤공흠 ,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은 당직에서 박탈 되었으며 즉 반대파의 정치적 숙청으로 결과가 초래 되었던 것이며 김일성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이었던 8월 종파사건은 이렇게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8월 종파사건의 결과 (후폭풍)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하여 북한의 정권 내부를 전부 장악한 김일성은 이후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반대파에 대해서는 숙청을 지시하였으며 같은 파벌인 갑산파라고 해도 자신의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무자비하게 숙청하였고 대표적으로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이 있다. 이후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의 독재를 막기 위해서 내정간섭까지 했지만 이를 견뎌내고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으며 1960년대까지 김일성은 더 많은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제거하여 주체사상을 결합시키면서 자신을 완벽하게 신격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즉 말해서 8월 종파사건에서 김일성의 승리로 지금의 북한을 막장상태로 몰아 넣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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