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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에 대한 반론들

똥베이런 2016.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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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국 국군 초창기 장성인 이형근 장군의 월간 중앙에 된 것을 토대로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라는 것들이 있는데요. 이형근 장군의 주장에 대한 반론들도 물론 존재합니다. 함께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반론 주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군 수뇌부의 적정보고 묵살


일단 일선부대의 적정보고가 묵살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그 주체는 국군 수뇌부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육군본부는 6월 23일에 미국 측에서 적의 남침 징후를 보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1950년 상반기 내내 지속된 위기설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미국의 적의 남침보고를 묵살하여 국군 수뇌부들은 아무 대응조차 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북축의 남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라고 말할 정도로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미국 등이 의심을 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며 당시에는 미국도 북한의 남침의도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지휘관들의 대규모 인사이동 및 전후방 부대의 전면교대


국군 수뇌부의 이러한 판단에 대해서는 의도는 좋았다는 형태에 가깝다. 하지만 이미 1950년 3월~4월 사이에 전쟁 위기설이 나올 정도로 북측과 남측의 군사적 정세는 위험수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빨치산토벌 및 치안유지위주로 임무를 수행했던 한국군의 인사체계 및 부대배치는 그대로 방치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불보듯 뻔했으며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 장군을 비롯한 육군 수뇌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될수록 유능한 지휘관을 선별하여 전방의 야전부대에 배치하고 야전부대의 전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려고 했다. 한국 국군의 수뇌부들의 이러한 의도는 좋았지만 이형근 장군이 지적했듯이 이 과정에서 재편성을 위한 시간은 불가피 했다. 국군 수뇌부의 의도와는 달리 북한이 남침을 하여 전쟁을 일으켜 버린 것이다.


비상 경계령 해제 및 외출/박 실시


이형근 장군은 비상경계령이 6월 11일부터 내려져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비상경계령이 내려져 있었다. 당시 남북한의 군사적인 충돌이 극에극을 달하고 있었으며 1950년 4월 29일에 최초로 비상경계령이 떨어졌다. 이후 5월 3일에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다가 다시 5월 9일에 경계령을 내렸으며 장기간의 비상경계령으로 인한 병사들의 스트레스 및 피로도 증가로 인하여 전투력이 많이 떨어져 있던 상황임과 당시 국군의 군량미가 바닥이 났음을 고려해봤을때 국군 수뇌부의 적절한 조치였다 이유를 따지고 보자면 당시 남한은 2,3차 산업국의 형태보다는 농업국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난한 농업국이었다는 것을 잘 고려해봐야한다. 북한은 정말 운좋은 기회를 잡아버린것이다. 


육군본부 장교클럽 댄스파티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이 많은 가운데 한국전쟁 개전 직전에 서울의 육군본부에 장교클럽이 개관한것은 사실이다. 이날 파티를 연 것도 위출/박을 실시한 것을 보았을 때 국군의 사기와 피로도를 올리기 위한 국군 수뇌부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형근 장군이 증언한것과 비슷하게 전방의 야전군 지휘관들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부대에 남아 있었다


적이 남침 이후 남한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강요


개전 당시 서울 북방을 방어하는 장병들의 희생은 육군본부의 대혼란과 정치권의 압박이 빚은 참사에 가깝다. 육군 6사단과 1사단이 간신히 방어하고 있던 춘천방어선과 파주-문산 방어선을 제외하면 모든 전선이 빠른속도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고 서울방어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여유병력이 생기는 대로 서울북부 방어선에 축차투입하는 실책을 저지른것이다. 하지만 이형근 장군의 책임도 일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형근 장군이 지휘하던 육군 제2보병사단 병력은 당시 포천-의정부 축선의 서울로 통하는 주요 방어선인 축석고개를 확보하려 했는데 채병덕 총참모장이 2사단 병력의 축차투입명령을 내린 것과는 별도로 제2보병사단 예하 연대 일부 병력을 대대별로 임시 배속하여 축차 투입해버린 것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당시 제2보병사단 지휘관 이었던 이형근 장군의 책임도 일부 존재한다는 점이다.


라디오 등 언론매체를 통한 허위방송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권 인사들의 저지른 실책이며 허위방송을 한 이유는 당시 국방장관인 신성모의 서울방어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반격을 해야한다는 주장때문에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으며 당시 국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이승만 정권의 행정부를 포함한 정치권은 허위방송을 하면서 몰래 서울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한강교의 조기폭파


당시 한강교 폭파계획은 당시 채병덕 총참모장이 세운것이지만 폭파시기를 사전에 정해놓지 않았다 따라서 판도를 고려해 본 뒤 아군 및 서울의 민간인들이 적절한 대피후에 그때 폭파를 감행하였더라면 채병덕의 한강교 폭파계획은 매우 적절한 조치로 평가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채병덕 등 육군 수뇌부가 지나치게 당황했다는 점이다. 당시 너무 빠른속도로 방어선이 무너지고 서울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육군수뇌부들이 당황한채 폭파시켜버린것 당시 채병덕 총참모장의 지시로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이 이형근 장군의 주장이지만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의 지시였다는 증거들이 나오기 때문에 국방장관의 지시로 폭파한것으로 보여진다.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 집행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은 정치적인 요소로 인하여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이 이루어진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형근 장군이 주장한것과는 달리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에 대한 배후는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 그리고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이 배후일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국민들에게 허위방송을 내고 몰래 서울을 도망간 이승만 정권의 행정부와 수뇌부들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정세가 바뀌었음을 인지하고 이승만 정권의 정권붕괴 압박으로 인한 조기사형이었다는 주장이 속속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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