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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12

동아시아 군사전문가들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을 당대 최강으로 평가하는 이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23전 23승을 달성하면서 한국사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군사조직입니다. 그런데 현대 군사전문가들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을 당대 최강의 수군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동아시아 군사전문가들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을 당대 최강으로 평가하는 이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군사전문가들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징비록, 난중일기에도 평소에는 인자하지만 군율을 어기면 어김없이 참수한다며 군율을 중요시했던 인물이라고 하는데요.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엄중한 군율은 조선 수군의 혼란을 방지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 수군의 병사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직전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어느 정.. 밀리터리 2018. 1. 12.
임진왜란 당시 전설의 23전 23승의 신화를 쓴 조선 수군의 군사기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대략 수십 척의 판옥선 함대를 이끌고 전투를 진행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수 십척의 판옥선을 지휘했던 방법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7척에서 8척 정도를 1개 함대로 구성하여 해당 함대를 표현하는 깃발 또는 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함대 간의 거리를 생각해서 함대 간의 거리 사이에 암호선을 통해 지시에 해당하는 연을 띄어 대장선의 지시를 전달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요. 실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암호명령체계는 1급 군사기밀에 해당하기 때문에 외부의 노출을 되도록이면 차단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군율을 엄격하게 했던 것도 군사기밀 노출을 우려한 것도 없잖아 있다고 하는데.. 밀리터리 2018. 1. 1.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승률 100%를 찍을 수 있었던 이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23전 23승 0패 0무를 달성했을 정도로 최강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승률 100%를 찍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승률 100%를 찍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노량해전까지 모두 승리하며 당시 동북아 최강의 함대로 거듭나게 됩니다. 또한 한산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남해안을 장악하기에 이르는데요. 조선 수군이 이렇게 적을 무자비하게 박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순신 장군이 전투 지역을 사전에 방문하여 치밀한 작전을 세웠기 때문인데요. 이순신 장군은 원래 전라도 출신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참모들의 도움으로 치밀하게 작전.. 밀리터리 2017. 10. 9.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반격할 수 있었던 이유 5가지 임진왜란은 1592년 (조선 선조 24년 임진년) 음력 4월 14일부터 1598년 (선조 31년 무술년) 음력 11월 19일까지 7년간 조선, 명나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동북아시아의 국제전쟁입니다. 흔히 임진왜란은 조선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경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분야에서 한국사에 중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정권교체와 장기적으로 중국 대륙의 왕조교체까지 동북아시아 3개국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전쟁입니다. 왕세자 광해군 분조의 각 지방의 의병 봉기 촉구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14대 국왕이었던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일본군이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진격해오자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고 일본군이 황해도로 북진해오자 선조는 또 다시 도망가버렸습니다. .. 밀리터리 2017. 7. 5.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무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5가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주력선이었던 판옥선을 이용한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일본 수군의 함선을 침몰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화포 사거리가 그렇게 길지 않았으며 함포 사거리가 5km를 넘는 시대는 19세기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하던 화포의 사거리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솔선수범과 공정한 신상필벌을 바탕으로 한 부하들의 신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지휘관의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 전라좌도 수군에 편제 되어 있는 병졸들의 가족관계 및 생활 등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병사들간의 의견 마찰로 일방적인 불이익을 얻은 병졸들에게 있어 중립적인 입장으로 해결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병사들과 .. 밀리터리 2017.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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