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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자신있게 참전한 이유들

똥베이런 2016.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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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공식명칭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중국측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UN연합군과 미군이 38도선을 넘는다면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는 통성명을 내었지만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가 무시한체 38도선을 넘어버리면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주더 등의 중국의 수뇌부들이 여러가지 승산을 보고 1950년 10월 8일에 한반도 출병을 결정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자신있게 참전한 이유들



중국 공산당 내부의 파병 결정


당시 중국 공산당은 북한 공산당과의 상당한 의리가 작용되는데 중국 내전인 국공내전에서 중공군이 수세에 밀렸던 1946년 ~ 1948년 사이에 북한측이 중국 공산당 고위급 인사들의 가족들과 부상병들을 수용해주었고 특히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에게 쫓기던 인민해방군이 북한지역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주었다는 점과 당시 중국 공산당의 핵심지역이 만주였다는 점에 비롯해보면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 북한이 유엔군에게 멸망 위기까지 갔다는 것을 강넘어 불 구경 할수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한반도 산악지형과 경험이 많은 인민해방군 주력부대 제4야전군


중국인민지원군은 한반도에서 인접한 만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중화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이 주력이 되었는데 당시 동북3성의 주둔하고 있던 제4야전군은 그야말로 중국 공산당의 핵심주력부대였으며 중공군 참전 초기에 병력은 27만명에 이르렀고 산악지형을 이용한 매복, 야간 기습, 게릴라 작전으로 전투를 벌인바 있으며 제4야전군의 경우에는 한반도와 비슷한 지형과 날씨인 만주일대에서 주둔하고 있던 병력이므로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승산을 보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국공내전 참전 경험으로 인한 베테랑 병사들


중공군의 경우에는 대부분 경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화력은 박격포 정도가 전부였다고 한다 포병이나 공중지원 같은 화력지원은 받지 못했지만 산악지형에서 국공내전의 경험을 토대로 보병 기동력을 활용하면서 포위전술에 상당히 능숙한 모습을 보였고 밀어부치기 식의 인해전술이 아닌 매복과 위장을 철저히 한 포위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당시 참전했던 중공군의 대부분이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이력이 있던 베테랑 병사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산당 내부의 능력있는 지휘관


한국전쟁에 참전할 당시 중공군의 총사령관은 펑더화이였으며 부사령관으로는 쑹스룬이라는 사람을 파견하였는데 쑹스룬은 중국 공산당 홍군 중에서도 제대로 군사교육을 받은 몇 안되는 엘리트 중 한명이었고 마오쩌둥과 함께 대장정에 참가한 인물로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를 지휘하였으며 올리버 스미스가 이끄는 미 해병대를 무섭게 몰아붙혔으며 중공의 입장에서는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능력있는 지휘관을 파견했다고 볼 수 있다



전략과 병력의 활용 가능성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할 당시에 총사령관은 펑더화이였는데 펑더화이의 경우에는 국공내전에서 전략가로 활동한 인물로 볼 수 있으며 펑더화이의 경우에는 한국전쟁 초기에 미군과 한국 국군의 약점을 간파한 뒤 이점을 적극 공략한것인데 미군과 연합군의 경우에는 기갑부대의 화력과 차량에 의한 물자, 병력수송에 크게 의존하였으므로 중공군은 신속하게 UN군의 후미를 치거나 보급로, 퇴로 등을 차단하면서 공격해왔다 중국 공산당은 한반도와 만주일대의 지형이 비슷하다는 점에 있어서 승산을 보고 자신있게 파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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