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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사망자가 제일 많은 전쟁 TOP 10

똥베이런 2016.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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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사망자가 제일 많은 전쟁 TOP 10





TOP 10 


러시아 적백내전

(사망자 추정 : 9백만여명)


출처 : 위키백과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 내전(러시아어: 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в России) 또는 적백 내전(赤白內戰, 

1917년 10월 25일 ~ 1922년 10월)은 10월 혁명이후에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자, 

옛 러시아 제국 영토를 둘러싸고 여러 당파와 교전 세력이 전투를 벌인 전쟁을 말한다.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와 미국, 영국 등의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무기와 돈을 지원받는 러시아 자본가 군대이자 느슨한 반(反) 볼셰비키 연합체인 하얀 군대 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내전이라는 주장의 근거였다. 가끔씩 일시적으로 좌익 친혁명 세력들이 반혁명세력과 싸우기 위해 붉은 군대와 개별 전투에서 연합하기도 했다.

여기에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제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영국), 미국, 오스만 제국, 핀란드, 일본 제국, 루마니아 등 자본주의, 제국주의 진영이 볼셰비키 정부를 제거하고, 공산주의자를 살해하며, 러시아를 자본주의 나라로 만들고, 공산주의 정부를 늘리는 것을 막고, 차르 같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로 돌려놓아, 이익을 얻기 위해 참전하였다. 러시아 내의 어떤 소수민족은 독립을 기치로 무장하여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런 세력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녹색 군대", 탐보프 지역에서 반혁명 성향의 반란을 일으킨 녹색 군대의 일파인 파란 군대, "우크라이나 무정부주의 검은 군대"가 포함된다. 또한 사병을 거느린 군벌도 내전에 개입했는데, 대표적으로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가 여기에 포함된다.

전투가 가장 잦았던 시기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였다. 주요 군사 작전은 1922년 10월 25일 붉은 군대가 프리아무르 임시정부가 있던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최후까지 남아있던 하얀 군대는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펠리야예프의 군대였다. 이들은1923년 6월 17일에 분쇄되었다.



TOP 9

제 세계1차 대전

(사망자 추정 : 1천 5백만여명)


출처 : 위키백과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제1차 세계 대전 (World War I, WWI 또는 WW1)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렸다. 미국에서는 처음에 유럽 전쟁(European War)라고 불렸다.제1차 세계 대전으로 병사 9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로 인해 사상자 비율이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 중 하나이며, 참전국의 수많은 혁명 등을 포함하여 주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 전쟁은 전 세계의 경제를 두 편으로 나누는 거대한 강대국들의 동맹끼리의 충돌이다.한쪽 편은 대영제국프랑스,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한 연합국이며, 다른 한편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침공했다.[11] 이러한 동맹은 재조직되었고 더 많은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확장되었다.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오스만 제국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에 가담했다. 궁극적으로 6천만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7천만명의 군인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에 동원되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제국주의때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 통첩을 내리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고,지난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동맹끼리 서로 연결되었다. 수주 이내에 강대국끼리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분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리면서 독일군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프랑스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파리 앞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춘 이후, 서부 전선은 1917년까지 참호전과 같은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지게 된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로 진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게 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코카서스메소포타미아시나이 반도 등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는 1915년 참전했고, 루마니아 왕국은 1916년 참전했으며, 미국은 1917년 참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이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동맹국이 러시아의 영토를 획득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춘계 공세 이후, 연합군은 일련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의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4개 주요 제국이 해체되게 되었다. 앞의 2개 제국은 승계국가가 탄생했지만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후자의 2개 제국은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유럽 및 서남아시아의 지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기면서 새롭게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 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유럽의 민족주의의 부활과 독일에서 파시즘의 장악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며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게 되었다.



TOP 8

티무르 정복전쟁

(사망자 추정 : 1천 7백만여명)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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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페르시아어: تیموریان (Tīmūriyān), 우즈베크어 : Temuriylar)은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현재의 우즈베키스탄중앙부)에 발흥했던 몽골 제국의 계승 정권 중 하나로서, 중앙아시아부터 이란에 걸친 지역을 지배했던 이슬람 왕조1370년~1507년)이다. 전성기의 판도로 북동쪽은 동투르키스탄, 남동쪽은 인더스 강, 북서쪽은 볼가 강, 남서쪽으로는 역사적 시리아아나톨리아 방면까지 이르러, 과거 몽골제국의 서남부 지역을 제패했다. 창시자인 티무르 재위 중에 티무르 제국이라 불렸다.

왕조의 시조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을 섬기는 발라스부의 출신으로 언어적으로 투르크화하고, 종교적으로는 이슬람화했던, 몽골군인(차가타이인)의 일원이었다. 티무르의 정복으로, 앞서 말한 대판도를 구가하지만, 그의 사후에 자손들에 의하여 제국은 분할되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분열하고 축소되어, 15세기 후반에는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의 두 정권이 남았다. 결국 16세기초에 우즈베크의 샤이반 왕조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영토를 빼앗겨 멸망했다.



공동 TOP 6

태평천국의 난

(사망자 추정 : 2천여만명)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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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 Taiping Rebellion)은 서기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다. 교전 상대는 만주족 황실의 청나라 조정과 기독교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의 주요 무대는 강소성절강성안휘성호북성이었으나, 14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북서쪽 끝의 감숙성을 제외한 모든 중국의 성을 최소 한번 이상 태평천국군이 지나갔다. 태평천국의 난은 명청전쟁 이래로 중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 전쟁이었으며, 인류 전체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유혈낭자한 내전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세기 최대의 군사분쟁이었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2천만 ~ 7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난민 신세가 된 사람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1851년 1월 1일, 청나라의 정규군인 녹영군이 광서성 금전현(오늘날의 계평시)의 기독교계 신흥종교인 배상제회를 타격했다. 배상제회 교주 홍수전은 자신이 야훼의 둘째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녹영군의 배상제회 공격은 금전 봉기로 이어졌다. 홍수전은 자신을 "태평천국의 천왕"이라고 선포했다. 청군이 광서성으로 출동하자 태평천국군은 1851년 9월 북쪽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1853년 3월 19일 태평천국군은 남경을 점령, 남경을 천국의 수도인 "천경"이라고 명명했다.

십여 년에 걸쳐 태평천국은 양쯔 강 유역 중류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으며, 이곳은 청나라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비옥한 땅이었기에 태평천국은 급격히 불어났다. 태평천국군은 1853년 6월 북진하여 청나라 수도 북경을 거의 점령할 뻔 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서쪽으로도 진군하여 안휘, 강소, 호북의 여러 군현을 손에 넣었다. 청나라 정규군은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대신 교착상태에 빠진 남경 공성에 집중했다. 그리고 호남성에서 증국번이 이끄는 민병대 상군이 궐기하여 청나라 조정측에 가담해 태평천국과 싸웠다. 증국번의 상군은 태평천국군을 성공적으로 토벌했고, 내전의 서부전선에서 태평천국의 팽창은 중단된다.

1856년, 태평천국의 동왕(東王) 양수청이 쿠데타를 시도(천경 사변)하여 태평천국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태평천국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동안 상군은 호북성과 강소성의 대부분을 재회복했다. 1860년 5월, 태평천국군은 1853년부터 남경을 공격하고 있던 청군을 무찔렀고(제2차 강남대영 공략), 이때 청나라 정규군이 거의 전멸함으로써 태평천국군은 청나라에서 가장 부강한 지역이었던 남쪽의 강소성과 절강성을 침략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되었다. 태평천국군이 강소성을 재탈환하는 동안 증국번의 민병대는 양쯔 강을 따라 내려가며 진군, 1861년 9월 5일 안경을 점령했다.

1862년 5월, 친정부 민병대는 이제 남경을 직접 포위하고 공성하기 시작했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태평천국군이 수 차례에 걸쳐 포위망을 뚫으려 했음에도 전선을 유지했다. 반란수괴 홍수전은 1864년 6월 1일 사망하고, 그 직후인 7월 19일 남경은 함락되었다(천경 공방전). 남경이 무너진 뒤 증국번과 그 제자들, 이홍장 및 좌종당 등은 제국의 구원자로 추앙되었고 19세기 말 중국 정치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절강성 북부에서 태평천국의 잔당이 홍수전의 어린 아들 홍천귀복을 앞세워 항전했으나 홍천귀복은 1864년 10월 25일 사로잡히고, 그 이후 태평천국 잔당은 강소, 절강, 복건의 산악지대로 밀려났고, 중국 대륙 최남단인 광동성까지 쫓겨났다. 그리고 광동에서 최후의 태평천국 잔당 지도자인 왕해양이 1866년 1월 29일 토벌되어 태평천국의 난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공동 TOP 6

스탈린의 학살

(사망자 추정 : 약 2천만여명)


출처 : 위키백과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문화어: 이오씨프 위싸리오노비치 쓰딸린, 1879년 12월 21일 ~ 1953년 3월 5일)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운동가 ·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 언론인이다.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1]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년 4월 3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1941년 5월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부장관을 겸하였다. 1945년 6월 27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가 중 하나였던 소련을 산업화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과학 기술의 개발에도 중점을 두어 과학과 교육, 물리학자 등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후에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발판을 만들었다.[출처 필요]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2][3]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조직자',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본래 이름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조지아어: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이며, 어릴 적의 이름이자 애칭은 소소(조지아어:სოსო)이다.[1]


TOP 5

명나라 멸망(이자성의 난)

(사망자 추정 : 약 2천5백여명)


출처 : 위키백과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장거정이 죽은 이후 명 신종 만력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동림당의 당쟁, 국본쟁과 만력태정 등의 문제가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만력삼대정의 문제와 만주지역에서 후금이 흥기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만력제 시기에 명나라가 쇠락으로 접어든 것으로 간주된다.
1620년 만력제 사후 그의 장자 주상락(朱常洛)이 등극하여 광종 태창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희종 천계제가 즉위하였다. 천계제는 즉위 초기 동림당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으나 당쟁이 격렬해지자 천계제 역시 정사에 뜻을 잃었다. 그 기회를 틈타 위충현이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동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위충현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이들은 정적으로부터 엄당(閹黨)이라고 불렸다. 1624년 엄당이 내각을 차지하였고, 위충현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위충현은 동림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1625년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수많은 동림당 인사가 투옥되었다. 이 시기에 정부의 행정 기능이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민변이 발생하였으며, 후금과 몽골이 변경을 위협하였다.
1627년 천계제가 중병이 들자 그의 동생 주유겸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마지막 황제 숭정제이다. 숭정제가 즉위한 이후 위충현의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 내외의 폐단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숭정제가 의도한 개혁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1629년 홍타이지가 장성을 돌파하여 북경까지 이르게 되자 숭정제는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원숭환을 사형에 처하였다.
홍타이지는 그 이후에도 6차례에 걸쳐 장성을 돌파하였으며 직예와 산동 지역을 유린하였다. 때문에 당시 직예 지역은 전란이 그치지 않고 전염병이 횡행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였다. 동북지역의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청나라의 군대가 장성을 압박하였다. 마침내 1640년 청나라가 금주(錦州) 등 지역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주력 군대를 격파하였다. 홍타이지는 명나라의 주요 장수인 홍승주(洪承疇) 등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에 명나라의 전선은 산해관(山海關)으로 후퇴하였다.
이 시기에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이자성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으로 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고, 이로써 명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황족과 관료들이 남경에서 남명을 세우고 청나라에 계속 저항했으나, 청나라의 신속한 공격 앞에 무너졌다. 마침내 1661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미얀마에서 영력제를 사로잡아 남명이 멸망했다. 그 외에도 정성공(鄭成功)과 그의 후손이 타이완을 점거하고 저항했으나, 1683년 청나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란 발생

그때 당시 명나라 농민들은 청나라와의 잦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 황제 숭정제의 포악성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때 천민 출신이었던 이자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명나라는 군대를 보냈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자성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카이펑과 시안을 점령했으며, 북경으로 진격했다.

명나라의 멸망

승승장구의 기세로 북경에 들이닥친 이자성의 반군을 막을 수 없었던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결국 황후와 딸을 죽이고 메이산 산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이로부터 이자성은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올랐다. 이로써 명나라는 277년이라는 역사가 끝이 났다.

오삼계의 공격

그때 후금군은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50만 명나라군 때문에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성이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과 가족들을 붙잡고, 휘하의 장수인 유종민이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취하자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고 후금에 투항했다. 후금군은 오삼계의 길잡이를 도움받아 북경으로 진격해 이자성의 난을 진압한다. 이자성은 40일밖에 황제 자리에 있지 못했다.



TOP 4

안사의 난

(사망자 추정 : 약 3천 6백만여명)


출처 : 위키백과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양귀비에 빠져서 정치를 고력사 등의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의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되었다.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을 당할 대로 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다.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이때 지배체제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다. 

구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Shi Rebellion)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녹사와 그 부하인사사명과 그 자녀들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녹사와 사사명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녹사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녹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하여 칭제를 했으며, 9년간 지속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중국의 인구는 3600만명이 줄어들었으며, 이것은 전란으로 소실된 호적 체계 때문이기도 하였다.



공동 TOP 2

몽골의 정복전쟁

(사망자 추정 : 약 4천만여명)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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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정복전쟁은 13세기 내내 계속되어 광대한 몽골 제국을 형성했다. 1300년경이 되면 몽골 제국의 영역은 아시아의 대부분과 동유럽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은 몽골의 침략과 약탈을 인간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 중 하나였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몽골인들이 팽창하면서 선페스트가 그들을 따라 아시아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이는 흑사병이라는 대규모 인명손실로 이어진다.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에 일련의 정복과 침공을 행하면서 세력을 불렸고, 1240년대에 동유럽에 도달했다.

몽골 제국은 1260년경 제국이 분할될 때까지 러시아계 국가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했다. 또한 14세기가 되면 중국 전역을 영향권 아래 두게 되어 원 황조가 성립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지방에서는 15세기를 지나면서 티무르 제국이 몽골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인도는 몽골의 침략을 받지 않았지만 19세기에 티무르 제국의 후예인 무굴 제국에게 정복된다.



공동 TOP 2

문화대혁명

(사망자 추정 : 약4천만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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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상·문화상·정치상 소란으로, 공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중국어 간체: 无产阶级文化大革命정체: 無産階級文化大革命병음: Wúchǎn Jiējí Wénhuà Dàgémìng우찬제지 원화다거밍[*])이고 약칭은 문혁(중국어: 文革병음: wéngé원거[*])이다. 문화대혁명의 형식상 표면에 내세운 구실은 '회생하려는 전근대성 문화와 시장정책 문화 를 비판하고 더욱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하자!"라는 정치·사회·사상·문화 개혁 운동이었지만, 실질로는 대약진 운동이 크게 실패한 탓에 정권 중추에서 잠시 물러난 마오쩌둥이 자신의 재부상을 획책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학생 폭력 운동을 동원해 시장 회생파를 공격하고 죽이려고 몰아간마오쩌둥파와 덩샤오핑파의 권력 투쟁을 겸하였다.

이 운동은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관료주의 요소가 공산당과 중국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청년 학생들과 민중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인민민주독재를 더욱 확고히 실현키 위해 트로츠키주의식의 진일보 투철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후의 영구적 계급 투쟁"을 통해 이런 것들을 분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마오가 문혁을 제창하게 된 동기는 노선을 변경한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공에서도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국에서 더욱 이상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한편, 마오쩌둥 자신이 시도한 대약진 운동에서 파멸적인 결과를 빚어 당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이덩샤오핑과 류샤오치에게 넘어가려하자, 극좌적 계급투쟁 형식을 빌어 이를 선회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는 것도 통설이다.

1969년 마오는 공식적으로 문혁이 끝났다고 선언하였고 학생과 노동 운동가들 일부를 체포하였으나, 사실상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사인방의 체포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여러 혼돈과 변혁을 통틀어 길게 문혁기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에서는 이 기간을 십년 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혁은 대개의 중국인들이나 외부인 심지어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국가적 재난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문혁의 공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1981년에 이를 마오의 과오가 크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나 문혁 기간에서의 마오의 과오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린뱌오와 사인방도 주요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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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세계대전

(사망자 추정 : 약7천만여명 ~ 1억 3천만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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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한자: 第二次世界大戰, 영어: Second World War 또는 World War II)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아돌프 히틀러가 다스리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한 때로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화민국 침략, 1939년 3월 나치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일본 제국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에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일본 제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결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고, 그 외에도 여러 제국들의 식민지가 독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는 약 2,500만 명이고, 민간인 희생자도 약 3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 제국은 1937년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하여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명의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고, 포로 학살등 여러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나치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였다.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소이탄으로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민간인 15만 명을 살상했고,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고,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는 드레스덴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도 매우 심했었다.

전쟁은 크게 서부 유럽 전선동부 유럽 전선과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외에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중동, 대서양 해역과 인도양 해역 등 기타 하위 전선도 2차 대전의 전역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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